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옷깃을 두 번 잡아 넘겼다. 평소라면 반바지를 입었겠지만 왜인지 셔츠에 긴 바지를 꺼내 입은 날.
오늘따라 날씨는 너무 더웠고 습한 기운 탓인지 인중까지 땀이 찼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가깝게 느껴지던 거리 또한 멀게 느껴진 날. 가까스로 잡은 택시 안에는 파리가 가득했고, 기사 아저씨는 파리를 내보낼 의지조차 잃었는지 열었던 창문을 닫아버렸다. 푸르른 하늘, 매미가 귀를 찢을 듯 울어댔고 더위를 알리려는 듯 지글지글 끓는 기운이 몸을 감쌌다.
평소와 다를 일 없던 날, 1년여간을 키워 온 화분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짐이 많네요, 화분까지 들고 계시고", "네, 선글라스를 챙겼어야 했는데 두고 왔네요, 긴 코드 대신 검은 셔츠로 레옹을 연출했습니다 하하" 실없는 농담을 뱉은 날.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화분만 내리 바라본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었나. 유독 매서웠던 옆 자리 사원은 퇴사 소식을 알자마자 미소를 지은 것 같았는데 전부 내 기분 탓일지 그것 또한 모를 일이다.
분명 쉬는 날 아침이었다. 전 날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놀아야 맞는 건데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을 감은 어제. 눈을 뜨니 오전 11시를 넘은 시간에 놀라고 말았다. 전날 먹은 항생제 탓인지 몸이 노곤했다. 꿈에서 그토록 화장실을 찾고 싶던 건 전부 현실 탓이었는지 일어나자마자 유산균을 입에 털어 넣고 화장실로 향한 나. 남자친구는 꿈에서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았다며 출국날 보자는 연락을 보내왔는데 그런 네가 밉다는 나의 말에 '너무 잠 많이 자지 마' 라며 꿈은 꿈이라는 시니컬한 답을 보내왔다.
"오빠, 오빠는 내가 왜 좋아?" 뻔한 대답을 하겠지만 물어보고 싶은 마음. 꿈에서라도 왜 나를 떠나 바람이 피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건 나 자신에 대한 약한 마음 아니었을까. 과거에 만났던 이들과 비교하고, 그들을 잠시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 내가 유약한 탓일 테다.
친구는 나에게 조금만 쉬어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정작 내가 쉬었는지도, 이대로 쉬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와중에도 나는 책을 거의 책을 읽고, 좋아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내게 가득 찬 음식 물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지. 웃으면 어금니 끝이 아리단 사실에 술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이쯤 되면 위스키 한잔 해야 될 것 같은 데.. 내 몸을 가득 채운 항생제 탓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른 체하곤 했는데, 지금은 모른 체가 실제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거지. 편히 쉬지 못하고 내가 나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양 열심히 하면 뭘 할련 지도 모를 시간이 흐른다.
"우리 대화를 좀 해야겠어요."라는 말에 "내가 요즘 시험 준비 중이라 조금 바빠서,,"라는 대답을 듣기도 하고, "언제 시간 돼?"라는 말에는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라는 말 줄임표를 보냈다.
아무렇지 않게 보내는 연락,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의미들. 모르겠는 하루의 반복. 인강을 틀어 놓고 채워지는 학습진행률 바를 보다 핸드폰을 켠 나. 모르겠다. 오늘은 그저 흘러 보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