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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10. 2020

슬픔의 위로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떨면서 두서없이 흔들리는 케이의 전화를 받은 건 밤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남편과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서 우리는 케이를 만났다. 그녀는 선불맞은 짐승마냥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다. 커튼 뒤에서 이상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전날까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와 공을 차던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남자의 죽음을 지켜봤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의사는 인공호흡을 하다가 일이십 분 간격으로 서너 차례 나와서 힘들다는 신호로 고개를 젓다가 들어갔는데, 아마 이런 방법으로 보호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 같았다.


케이와 나는 같은 독서모임의 멤버였다. 나이 차가 있어서 그런지 케이가 나를 많이 따랐다. 케이의 남편은 그날 저녁 부부모임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쓰러졌다. 119 구급차를 타고 갈 때도 조금 어지러운 정도라 말해서 케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까지 생각했다. 구급대원은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그들을 내려놓고 가 버렸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케이의 남편이 쓰러졌는데, 그 병원에는 심장 수술을 할 의사도 시설도 없었다.


후일 케이는 많은 일들을 되돌려 놓고 싶어 했다.

만일 큰 병원에 갔었더라면. 술을 조금 덜 마셨더라면. 그날 저녁 모임에 안 갔더라면.


밤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시간에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하나 둘 모였지만,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이 하나 있다. 물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케이의 딸이 새벽 세 시에 잠이 깨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의논했다. 아이에게 아빠의 죽음을 알릴 것인지, 숨길 것인지. 마지막을 보여줄 것인지, 말 것인지. 아무도 어느 게 옳다고 단정 짓지 못했다. 모임의 리더인 선생님이 그래도 아이들이 아빠와 작별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눈을 비비고 아이들이 왔는데, 큰 애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메건 더바인의 책, ‘슬픔의 위로’를 읽는 내내 나의 마음을 점령한 것은 케이였다.




메건은 평범한 어느 여름날 눈앞에서 남편이 익사하는 사고를 당한다. 작가는 그 시기를 돌아보며 상실로 슬픔을 겪은 당사자와 주변인들에게 조언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접근한다. 이러한 의도가 슬픔에 빠진 당사자에겐 편치 않다. 정말로 필요한 위안을 주지 못 한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선의는 역효과를 자아낸다. 슬픔은 해결해야 할 문제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케이는 그날 이후 공황장애를 앓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외출이 힘들 정도로 심하게. 나는 케이가 가능하면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래야 아이들과 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케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걱정이 돼서 어느 날 음식을 만들어 케이의 집을 찾아갔다. 미리 연락하면 오지 말라 할까 봐 집 아래에서 연락하고 올라갔다. 집은 난장판이었다. 현관에서 주고 나왔는데 케이는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하는 표정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느끼려면 상대방이 당신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슬픔 속에서 진정한 위로는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작가는 남편이 죽은 지 5주 정도 지났을 때 사람들에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 무슨 일 있어?

-응, 남편이 죽었어.

-아직도야?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괴로운 거야?

작가는 그렇다고 말한다. 5주, 5년이 지나도 그럴 거라고.


다섯 달이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이 작가에게 말했다.

-이렇게 엄청난 상실감을 주는 일은 8년이 지나도 마치 8일 지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작가는 자기가 들은 최고의 말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길어야 너무 긴 것인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나는 케이와 아이들과 마주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저만치서 그들이 웃으며 걸어오는 걸 볼 때면 나는 미안했다. 혹시 나를 보며 그들이 그날 밤을 떠올릴까 봐. 나를 만나면 아이들은 웃음을 그쳤다. 표정이 조금 굳었다. 나는 웃으며 잘 지내니, 하며 스쳐 지나갔다.


슬픔의 양극단에도 중간지대가 존재할 텐데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있거나 탈출하는 것만 생각한다. 우리는 그 중립적인 공간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 중간지대를 찾는 것이 해야 할 일이다. 그곳은 슬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존중하는 곳이며, 사랑의 처음부터 끝까지다.


심리학자 폴린 보스는 상실이나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서구 문화의 숙달 지향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잡고 다시 정상으로 돌리려는 의도는 대화를 중단시키고 연대와 친교를 막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버리고 신비스러운 사랑을 대하듯 다가간다면 지지를 말하는 언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문제와 싸움을 벌이면 서로의 마음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슬픔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그것을 견디기 쉬워진다.
친구, 가족, 이웃, 책. 이 모든 것들이 슬픔을 겪을 때 가장 유용한 도움의 자원이 될 수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려 할 때는 최악의 자원이 될 수 있다.


-괜찮니? 이제 좀 어떠니?

나는 늘 케이를 만나면 이렇게 물었다.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케이는 늘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아 보였다.


우리 사회에서 슬픔의 문화가 엉망진창인 이유는 고통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고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상실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이다. 슬픔을 견뎌내는 방법은 고통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지 고통을 덮어 가리거나 서둘러 벗어나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의 시각을 잃지 않고 계속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이유를 찾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상실에 대한 방어기제로 서로를 타자화 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고통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할 생물학적 필요성이 있다. 표현이 허락되지 않는 고통은 우리 내부로 향해져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낸다.



몇 달 후 나는 케이를 불러내  또래 친구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 케이는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슬픔은 친절이 필요하다. 친절함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다. 피곤하면 자고, 가기 싫은 모임은 거절하고, 누구를 만나러 가다가 싫으면 차를 돌리는 일이다. 자신만이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다. 스스로 돌봐야 한다. 슬픈 자아에게 친절하게.
인생의 큰 사건을 겪은 이들에게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고통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부당한 요구이다. 그들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잊고 살아가는 일도 없다. 오직 함께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작가는 치유를 위한 다양한 조언을 한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숨을 길게  내쉴 것. 그림 그리기나 콜라주 같은 창의적인 활동을 할 것, 거기엔 글쓰기도 포함된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파블로 네루다



일 년 후 케이는 다른 도시로 이사 갔다.

나는 그녀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케이가 알리지 않고 떠난 건 실수라 하기엔 무지에 가까웠던 나의 슬픔의 위로 때문인지 모른다. 그때 나는 케이를 도대체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슬픔의 위로』 메건 더바인, 김난령 옮김, 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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