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픔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접근한다. 이러한 의도가 슬픔에 빠진 당사자에겐 편치 않다. 정말로 필요한 위안을 주지 못 한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선의는 역효과를 자아낸다. 슬픔은 해결해야 할 문제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느끼려면 상대방이 당신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슬픔 속에서 진정한 위로는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온다.
슬픔의 양극단에도 중간지대가 존재할 텐데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있거나 탈출하는 것만 생각한다. 우리는 그 중립적인 공간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 중간지대를 찾는 것이 해야 할 일이다. 그곳은 슬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존중하는 곳이며, 사랑의 처음부터 끝까지다.
심리학자 폴린 보스는 상실이나 슬픔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서구 문화의 숙달 지향성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잡고 다시 정상으로 돌리려는 의도는 대화를 중단시키고 연대와 친교를 막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버리고 신비스러운 사랑을 대하듯 다가간다면 지지를 말하는 언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문제와 싸움을 벌이면 서로의 마음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슬픔의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그것을 견디기 쉬워진다.
친구, 가족, 이웃, 책. 이 모든 것들이 슬픔을 겪을 때 가장 유용한 도움의 자원이 될 수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려 할 때는 최악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슬픔의 문화가 엉망진창인 이유는 고통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고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상실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반응이다. 슬픔을 견뎌내는 방법은 고통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지 고통을 덮어 가리거나 서둘러 벗어나려는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의 시각을 잃지 않고 계속 열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이유를 찾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상실에 대한 방어기제로 서로를 타자화 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고통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할 생물학적 필요성이 있다. 표현이 허락되지 않는 고통은 우리 내부로 향해져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낸다.
슬픔은 친절이 필요하다. 친절함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다. 피곤하면 자고, 가기 싫은 모임은 거절하고, 누구를 만나러 가다가 싫으면 차를 돌리는 일이다. 자신만이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다. 스스로 돌봐야 한다. 슬픈 자아에게 친절하게.
인생의 큰 사건을 겪은 이들에게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고통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부당한 요구이다. 그들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잊고 살아가는 일도 없다. 오직 함께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파블로 네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