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아니꼽다

마음 다스리기

by 제인


추석 지나서 친구들을 만났더니,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요즈음 우리는 분위기를 잘 맞춰주지 않으면 제대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다. 순번대로 말하게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뜬금없는 질문으로 흐름이 끊어지기도 하고 중간에 끼어든 이야기를 듣다가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 이제 생각났어. 계속할게.


이번 모임 담론의 주제는 단연 ‘아들과 며느리’였다.


딸과 아들을 삼십 년 키워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성에 따른 특징인 것 같았다. 딸은 평소에 잔잔하게 애를 먹이고, 아들은 조용히 있다가 한 번씩 놀라게 다. 행동반경이 아들이 넓어서인지 모른다. 축구를 하다 다친다든지, 오토바이나 자동차 사고 같은 것.

그간 우리는 아들 때문에 몇 번 간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다지만, 일 년이나 지나서야 아들의 등에 깊게 파인 상처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다. 외국 갔을 때 화장실에서 뒤로 넘어져 다친 상처라나. 그럴 때는 서운하다 못해 원망스럽다. 어떻게 알리지도 않고 넘어갔는지.

딸은 자주 이야기를 하는 편이고, 아들은 묵혔다가 곪고 나서 터트린다.




최근 며느리를 본 친구들이 듣기에 낯선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시어머니 A:

-엄마, 명절인데 엄마가 영지한테 전화 한 번 해요.

아들이 결혼하고 첫 번째 맞는 추석이다.

-아니,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해야지, 이건 거꾸로 같은데?

-에이, 엄마. 아무려면 어때요. 엄마가 해주심 좋죠.

아들의 부탁에 나는 며느리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다.


-얘야. 어떻게 지내니?

-아유, 어머니 전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죠.



시어머니 B:

-저기, 엄마. 이번 추석엔 저 사람 친정으로 휴가 보내면 어떨까요?

-휴가… 친정으로?


-저 사람 아기 낳고 너무 힘들어하니까 보기에 안쓰러워서요. 이번 추석에는 아예 친정에 가서 푹 쉬게 하면 좋겠어요. 아기는 우리가 돌보고.

-으….


그러고 맞은 추석, 아들과 손자, 남편과 추석을 지내니 은근히 편한 구석이 있었다. 신경 써 줄 며느리가 없어서 그런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편하게 지내도 되는지 모르겠어. 이러다 남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어머니 C:

아들 집에 갔더니 며느리는 퇴근 전이었다.

아들이 열심히 부엌에서 초밥을 만드는데,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은근히 속에서 불이 났다.


-얘, 넌 밖에서도 칼질하는데 집에서도 칼질하니?

아들은 외과 의사다. 부엌에서 일하다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나 싶어서 나는 걱정이 됐다.


-걔보고 쌀이라도 씻어놓고 출근하라고 해라. 차라리 시켜 먹던가.


며칠 후 아들이 전화했다.

-엄마, 맛있는 거 좀 해서 보내줘요. 엄마 음식 잘하잖아.


모처럼의 아들 부탁에 나는 신이 났다.

김치, 잡채, 도라지 무침, 갈비찜, 무나물을 만들어 아들 집에 올려 보냈다.


-아들, 오늘은 뭐 먹었어?(기대 기대)

-파스타 사 먹었어요. 저 사람이 먹고 싶대서.


-엥?(급히 말을 삼킨다 ) 김치는 어땠어?

-저 사람은 백김치 밖에 안 먹는데요.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욱하고 성질이 났다.

-잡채랑 안 먹으면 냉동실 넣지 말고 다 버려라!




-직장 다니는 며느리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아는데, 아들이 늦게 퇴근해 쌀 씻고 있는 거 보니까 어찌나 성질이 나던지.

-얘, 며느리가 너랑 똑같아. 아들은 네 남편이랑 닮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사실 우리가 웃은 이유는 다른데 있다. 친구는 예전부터 요리에 관심 없는 딸 대신 사위가 주로 음식을 한다며, 늘 사위 자랑을 해왔다.


우리는 친구에게 충고했다.

-넌, 듣지도 못했니? 명절이면 고속도로 휴게소 쓰레기통이 온통 음식으로 가득 찬다는 거.

-무슨 음식?

-시어머니가 준 받아와서 죄다 거기 버린다잖니.

-그건 진짜 나쁘다. 받아가지 말아야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지 않겠다는데 떠안기니까 그렇지.

일찌기 득도한 시어머니가 말했다.


가족 카톡방에 답을 늦게 하는 것도 문제였다.

-엄마, 왜 집 사람 카톡에 답 안 해?

-못 봤지.

-얼른 전화 해. 저 사람 기분 상하기 전에.

-알았어.


거꾸로인 경우도 있었다.

시어머니가 2시에 보낸 카톡에 며느리가 저녁이 되어도 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걸 '읽씹'이라 한다던가. 며느리는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느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대답하기 싫고, 귀찮아서


결국 속이 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고, 어머니. 너무 피곤해서 잤어요.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어머니는 속아준다.


시부모 생일을 챙기는 문제, 명절에 오가는 문제.

-집집마다 가풍이란 게 있는데….

-요즘 애들이 달라진 것 같아도, 우리 때랑 같은 게 있더라.


한 지역에서 삼십 년 가까이 함께 산 친구들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한 세대만큼의 생각 차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간 걸까?


한 친구는 아들이 데려온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들어 몇 개월째 우울증에 빠졌다.

방실방실하던 얼굴이 반쪽이 됐다. "누구를 데려오든 마음에 안 들긴 하지,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이 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과정에서 그녀는 아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수시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 자식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사랑하는데, 사랑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녀석 등짝을 아프도록 패주고 싶다.
네가 그 애 바람막이냐?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그녀에게 뭐라고 조언하기 힘들었다.


아들 이기는 엄마 어딨니,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면 어때. 우리가 갑이 아니야. 이미 을이야. 사이 틀어지면 며느리가 손자도 안 보여준데.

이런 말들이 두런두런 오갔다.


내 주변에는 결혼할 때 시어머니에게 상처 받은 며느리들이 많이 있다. 그런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람이 거칠어진다. 그 일로 결국 헤어진 부부도 있다. 고부간 갈등은 오랜 시간 가족 모두를 힘들게 다. 윗사람이 칼자루를 쥔 것 같지만 세월 지나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풍이 아니꼽다.

친구가 길가의 가로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단풍이 아름답지, 왜 아니꼽니?

-저희들은 좋아서 야단인데, 나만 이러니… 살다보니 단풍이 아니꼬울 때도 있네.


-너무 멀리 가지 마. 돌아오기 힘들어.

헤어지면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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