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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Oct 23. 2020

단풍이 아니꼽다

마음 다스리기


추석 지나서 친구들을 만났더니,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요즈음 우리는 분위기를 잘 맞춰주지 않으면 제대로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다. 순번대로 말하게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뜬금없는 질문으로 흐름이 끊어지기도 하고 중간에 끼어든 이야기를 듣다가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 이제 생각났어. 계속할게.


이번 모임 담론의 제는 단연 ‘아들과 며느리’였다.


딸과 아들을 삼십 년 키워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차이가 뭘까 생각해보니 성에 따른 특징인 것 같았다. 딸은 평소에 잔잔하게 애를 먹이고, 아들은 조용히 있다가 한 번씩 놀라게 다. 행동반경이 아들이 넓어서인지 모른다. 축구를 하다 다친다든지, 오토바이나 자동차 사고 같은 것. 

그간 우리는 아들 때문에 몇 번 간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다지만, 일 년이나 지나서야 아들의 깊게 파인 상처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다. 외국 갔을 때 화장실에서 뒤로 넘어져 다친 상처라나. 그럴 때는 서운하다 못해 원망스럽다. 어떻게 알리지도 않고 넘어갔는지.

딸은 자주 이야기를 하는 편이고, 아들은 묵혔다가 곪고 나서 터트린다.




최근 며느리를 본 친구들이 듣기에 낯선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시어머니 A:

-엄마, 명절인데 엄마가 영지한테 전화 한 번 해요.

아들이 결혼하고 첫 번째 맞는 추석이다.

-아니,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해야지, 이건 거꾸로 같은데?

-에이, 엄마. 아무려면 어때요. 엄마가 해주심 좋죠.

아들의 부탁에 나는 며느리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다.


-얘야. 어떻게 지내니?

-아유, 어머니 전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죠.



시어머니 B:

-저기, 엄마. 이번 추석엔 저 사람 친정으로 휴가 보내면 어떨까요?

-휴가… 친정으로?


-저 사람 아기 낳고 너무 힘들어하니까 보기에 안쓰러워서요. 이번 추석에는 아예 친정에 가서 푹 쉬게 하면 좋겠어요. 아기는 우리가 돌보고.

-으….


그러고 맞은 추석, 아들과 손자, 남편과 추석을 지내니 은근히 편한 구석이 있었다. 신경 써 줄 며느리가 없어서 그런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편하게 지내도 되는지 모르겠어. 이러다 남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어머니 C:

아들 집에 갔더니 며느리는 퇴근 전이었다.

아들이 열심히 부엌에서 초밥을 만드는데,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은근히 속에서 불이 났다.


-얘, 넌 밖에서도 칼질하는데 집에서도 칼질하니?

아들은 외과 의사다. 부엌에서 일하다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나 싶어서 나는 걱정이 됐다.


-걔보고 쌀이라도 씻어놓고 출근하라고 해라. 차라리 시켜 먹던가.


며칠 후 아들이 전화했다.

-엄마, 맛있는 거 좀 해서 보내줘요. 엄마 음식 잘하잖아.


모처럼의 아들 부탁에 나는 신이 났다.

김치, 잡채, 도라지 무침, 갈비찜, 무나물을 만들어 아들 집에 올려 보냈다.


-아들, 오늘은 뭐 먹었어?(기대 기대)

-파스타 사 먹었어요. 저 사람이 먹고 싶대서.


-엥?(급히 말을 삼킨다 ) 김치는 어땠어?

-저 사람은 백김치 밖에 안 먹는데요.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욱하고 성질이 났다.

-잡채랑 안 먹으면 냉동실 넣지 말고 다 버려라!




-직장 다니는 며느리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아는데, 아들이 늦게 퇴근해 쌀 씻고 있는 거 보니까 어찌나 성질이 나던지.

-얘, 며느리가 너랑 똑같아. 아들은 네 남편이랑 닮았고.


우리는 깔깔 웃었다.

사실 우리가 웃은 이유는 다른데 있다. 친구는 예전부터 요리에 관심 없는 딸 대신 사위가 주로 음식을 한다며, 늘 사위 자랑을 해왔다.


우리는 친구에게 충고했다.

-넌, 듣지도 못했니? 명절이면 고속도로 휴게소 쓰레기통이 온통 음식으로 가득 찬다는 거.

-무슨 음식?

-시어머니가 준  받아와서 죄다 거기 버린다 하잖니.

-그건 진짜 나쁘다. 받아가지 말아야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지 않겠다는데 떠안기니까 그렇지.

일찌기 득도한 시어머니가 말했다.


가족 카톡방에 답을 늦게 하는 것도 문제였다.

-엄마, 왜 집 사람 카톡에 답 안 해?

-못 봤지.

-얼른 전화 해. 저 사람 기분 상하기 전에.

-알았어.


거꾸로 경우도 있었다.

시어머니가 2시에 보낸 카톡에 며느리가 저녁이 되어도 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걸 '읽씹'이라 한다던가. 며느리는 왜 답을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느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대답하기 싫고, 귀찮아서


결국  속이 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고, 어머니. 너무 피곤해서 잤어요.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어머니는 속아준다.


시부모 생일을 챙기는 문제, 명절에 오가는 문제.

-집집마다 가풍이란 게 있는데….

-요즘 애들이 달라진 것 같아도, 우리 때랑 같은 게 있더라.


한 지역에서 삼십 년 가까이 함께 산 친구들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한 세대만큼의 생각 차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간 걸까?


한 친구는 아들이 데려온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들어 몇 개월째 우울증에 빠졌다.

방실방실하던 얼굴이 반쪽이 됐다. "누구를 데려오든 마음에 안 들긴 하지,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이 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과정에서 그녀는 아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수시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 자식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사랑하는데, 사랑해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녀석 등짝을 아프도록 패주고 싶다.
네가 그 애 바람막이냐?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니 우리는 그녀에게 뭐라고 조언하기 힘들었다.


아들 이기는 엄마 어딨니,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면 어때. 우리가 갑이 아니야. 이미 을이야. 사이 틀어지면 며느리가 손자도 안 보여준데.

이런 말들이 두런두런 오갔다.


주변에는 결혼할 때 시어머니에게 상처 받은 며느리들이 많이 있다. 그런 상처는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람이 거칠어진다.  일로 결국 헤어진 부부도 있다. 고부간 갈등은 오랜 시간 가족 모두를 힘들게 다. 윗사람이 칼자루를 쥔 것 같지만 세월 지나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단풍이 아니꼽다.

친구가 길가의 가로수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단풍이 아름답지, 왜 아니꼽니?

-저희들은 좋아서 야단인데, 나만 이러니… 살다보니 단풍이 아니꼬울 때도 있네.


-너무 멀리 가지 마. 돌아오기 힘들어.

헤어지면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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