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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11. 2020

이만하면 괜찮은 노년

마지막까지 우아하고 품위 있게


우리 동네 성당에는 노인대학이 있다. 입학 연령이 65세인데 요즘은 그 나이에 아무도 입학하지 않는다. 누군들 65세에 노인이란 소리를 듣고 싶을까. 지난번에 일흔인 어르신이 입학하더니 자기가 제일 젊다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손해 보는 느낌인 것 같았다. 반면에 엊그제 세례 받은 할머니는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냐고 물었더니 노인대학 간다고 신이 났다. 자기를 보고 다들 “새댁, 새댁.” 부른다며.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새댁 소리 듣겠어요, 했다.


인간관계가 힘들 때는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결국 노인대학에서 모두 만날 거면서 쓸데없이 아옹다옹하네.’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 다가오는 질병, 도달하고야 마는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노인대학에는 여러 반이 있다. 태극권. 노래교실. 동화 읽기. 미술. 요가. 신자가 아닌 어르신도 노인대학을 다닐 수 있다. 어르신들이 성당을 다니는 건 운동도 되고 친구들도 만나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굳이 성별을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남자들과 여자들 모임이 따로 있다. 대부분 어느 한쪽에 가입하는데, 절대로 가입 안 하는 분들도 있다.


"난, 절대 거기 안 나가." 하면서 손 젓고 재빨리 사라지는 여든 넘은 할머니가 있다. 성당에서 일본어를 가르치신다. 유치원에 봉사도 나가신다. 할머니가 노인대학에 들어가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풍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잘 안 된다. 자연히 또래 친구도 없다. 할머니는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요즘은 많이 늙으셨다. 스쳐 지나가도 못 알아보신다.


엄마가 들어간 요양병원은 5층 건물이었다. 엄마는 1층으로 들어갔지만, 두 달 보름 후 동생은 5층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코로나로 면회 금지여서 입원 초기에 언니가 다녀온 후 아무도 엄마를 볼 수 없었다. 언니가 찍어 올린 동영상에서 간호인들은 상냥하고 좋아 보였다. 안심이 됐다.


장례식을 마친 후 동생은 엄마의 요양병원 환자복을 병원에 돌려주러 가지 않았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 번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제 요양 병원에서 노인 환자를 묶어놓았다고 고발하는 뉴스를 들었다. 코로나가 빼앗아 간 건 마스크 안 쓸 자유만이 아니었다.




내과 의사이자 노인 의학 전문의인 데이비드 재럿이 40년간 지켜본 노인들의 죽음에 관하여 책을 썼다. 그의 책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에서 이 글의 제목을 가져왔다.

‘이만하면 괜찮은 노년’

죽음보다는 노년이 그나마 부담이 덜 해서.

 

요리 전문가이며 미식가인 플로이는 대장암 완치 판정을 듣고 저녁에 와인 곁들인 식사를 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동거인에게 몸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죽었다. 집 앞 계단에 앉아 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던 패트릭은 갑자기 심장의 통증을 느꼈다. 달려온 누이들이 미처 의사를 부르기 전에 죽었다. 동맥 류 환자인 메리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을 때는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간호사가 있었다.


이들의 죽음은 불행한 죽음일까.

응급 호출, 정맥주사, 심폐 소생술이 없어서?


졸업 전 선택 과목으로 인도에서 의료 활동을 할 때 저자는 로빈슨 박사를 만났다. 2017년 세상을 떠난 로빈슨 박사는 그해까지 날마다 하루 24시간씩 병원에서 당직을 섰다. 그는 힌두교도인 주민들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았고, 언론의 주목을 끌거나 숭배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를 성인 saint에 가까운 존재로 여긴다.


삶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죽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던 목숨이 구조되었다. 소뿔에 받혀 내장이 쏟아져 나온 어느 노인이 수건으로 창자를 감싼 채 걸어 들어왔다. 그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상처를 봉합했으며 일주일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의학의 진정한 승리다. 비싸거나 화려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인간은 기초 의료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치료 시점에 모든 시민이 무상으로 기초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다면, 어떤 나라건 진정한 문명국이라고 자처할 수 없다. 어느 나라에서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들이 중환자실에서 인생을 마감하고 있을 때, 다른 나라에서는 어린아이가 말라리아로 죽어가고 있다면 근본적인 뭔가 잘못된 것이다. 68P



의사와 환자 간 분쟁의 원인은 유령 계약서 때문이라고 한다.


기대와 결과의 차이. 우리도 은연중 알지만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실들. 환자들은 의학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의 모든 병을 치료할 것이라고  믿는다. 의사들이 실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들 입장은 매우 다르다. 의사들은 의학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때로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안다. 인생처럼 의학도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노인 요양 병원의 분위기는 간호인의 활력과 성격에 온전히 좌우된다.

정원의 사과나무에 과일이 열리고, 고양이와 애완용 앵무새, 직원 자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까지 일상이 주는 혼돈이 모두 있는 병원이 바람직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는 가까운 노인 요양 병원을 찾는 친구에게 말했다.

"집 가까이 도시에 위치한  요양 병원을 찾을 게 아니라 조금 멀어도 마당이 있는 곳이 좋겠어." 

다른 친구가 말했다.

"간호인들이 환자를 정원으로 데려 나오는 것조차 귀찮아한다더라."


환자가 정원의 나무 아래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한다면 누리게 해 줄 순 없는 걸까.


장기 치료 노인 의학 병동에서도 환자의 회복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의료진의 성격이다. 심지어 심각한 치매를 앓는 환자들조차도 유머를 이해한다. 말 못 하는 아기가 배에 숨을 불어 방귀 소리를 내면 즐거워하는 것처럼. 브랜다는 남자 환자에게 맥주 한 병을 주곤 했고, 흡연자들을 정원으로 데려가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담요를 덮어 주었다. 118P


질병이 다가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현대 의학의 많은 부분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나이 많은 이들 이미 생기를 잃은 이들에게서 목숨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죽음이 몇 달 남지 않은 사람들, 삶을 의미 있게 연장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 품위 비슷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복잡하고 힘든 치료에 지배당하고 있다. 치료할 수 있다고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질병은 무거운 짐이며 치료도 무거운 짐인 데 둘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40세 환자가 견딜 수 있는 치료가 80세 환자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을지 모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의료라면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을 새로운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214P



가톨릭 신자인 저자는 안락사에 반대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결정하는 권리는 찬성한다.


어떤 종류의 노년을 보내고 어떻게 세상을 떠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대해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고 가족들과 함께 서류로 작성해두어야 한다. 폐렴에 걸려도 항생제를 투여하지 말고, 생명 유지 장치를 부착하지 않겠다는. 언제? 일흔? 일흔다섯? 판단력이 손상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 모든 고통이 끝날 수도, 모든 고통이 연장될 수도 있다.



  졸업하는 학생들이 가나의 장례 모습을 패러디했다 : 의정부고 학생자치회 페이스북


얼마 전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나의 장례 풍습을 흉내 냈다가 본의 아니게 인종 차별 문제에 휘말렸다. 하지만 실제 가나에서 장례식은 축제다. 고통을 끝마쳤다는 의미의.


80대 후반인 맥켄지는 집에 없었다. 이웃이 그가 사냥하러 갔으니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노년은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하면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어떤 활동을 하면서 말이다. 45P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산에만 다닐 것인가.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을 것인가.


60대에 벽돌 나르는 일꾼이 되기는 힘들지만, 젊은이들과의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그들과 접점을 잃으면 삶과의 접점도 잃어버린다. 크루즈를 타고 같은 나이의 은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안정된 이들이 불안정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지금껏 누려온 특권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에 맞서 경험과 지혜, 이해심으로 젊은이들 대신 싸워야 한다. 큰 집을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다음 의회 임기만큼 살 것 같지 않으면 투표권 포기도 고려해 보자.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냉혹하게 깨닫자. 은퇴하고 나서도 쓸모 있는 일을 하며 지내야 한다. 이십 대 가족이 노인을 돌보느라 밖에 나가서 즐겁게 지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저자는 재삼 강조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노인의 무지(Aged Ignorance)'


수염을 잔뜩 기른 노인이 거대한 가위를 들고 있다. 노인은 작고 벌거벗은 몸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날개를 자르고 있다. 이 그림은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냉혹하게 깨우쳐준다. 286P


얼마 전 돌아가신 친구 H의 아버지는 매일 서점이나 도서관을 다니셨다. 자식들 집에 가게 되면 그 일정에 있는 모든 장소를 꼼꼼히 찾아보고 천천히 저녁에야 들어가셨다. 이런 예를 들긴 하지만 실제 살아온 모습이 다른 노인들이 어떻게 창조적 활동을 할 것이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그나마 나는, 읽고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


성당 문이 닫혔을 때 강가 산책로에 나와 계신 어르신들을 많이 봤다. 벤치에 앉아서 두 손가락을 마주 닿게 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노인대학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활기 없어 보였다. 갑자기 부쩍 늙은 것 같았다.


영국에서는 50세가 되면 지역 보건의가 건강검진을 하라는 전화를 한다. 70세가 되면 집을 정돈하라고 전화로 일깨워주면 어떨까, 저자는 제안한다. 인간은 동물 중 가장 말을 잘하는 존재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말을 하자. 대화를 하자. 그러면 자신의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마지막까지 우아하고 품위 있게.


#이만하면괜찮은죽음, 데이비드 재럿, 김율희 옮김,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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