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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15. 2021

『2061』, 이인화

인공지능과 인간, 미래와 과거


오래전 이인화의 소설『영원한 제국(2008)』을 읽었다. 이후 그가 이에 버금가는 새 소설을 내놓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는 글을 어디선가 봤다. 몇 년 전 그의 이름이 잠시 뉴스에 오르내렸고, 얼마 후 그는 사라졌다.


『2061』은 모처럼 만나는 선 굵은 소설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인공 지능의 묘사가 흥미롭다.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복제 인간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2005)』에 이미 등장했다. 이 책에서 복제인간은 생식만 불가능할 뿐 거의 인간으로 다가가 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생식 가능한 복제인간이 나온다. 2061년에 등장하는 AI는 인간을 숙주로 기생하고, 반대로 인간이 AI에 기생하기도 한다. AI 사이에 생식도 가능해 이들을 통틀어 혼종 인간이라 부른다.


21세기 이후 미래에도 바이러스는 계속 출몰했다. AI정부는 앞으로 출몰 예정인 아바돈 바이러스를 1896년 조선에서 가져와 실험하려 한다. 주인공 재익은 감옥에 유폐된 한글 학자이다. 정부는 그를 조선으로 보내려고 설득한다.


한국은 2049년 핵전쟁으로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 한국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었고, 오직 '이도'만 살아남았다. 이도는 한글이 아니다. 세종이 15세기에 창제한 표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문자다. 재익은 한국의 붕괴를 막고 싶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 해례본을 없애면 가능하다는데.


책을 읽으며 든 의문은 왜 하필 1896년 조선이냐는 거였다. 그때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이듬해인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으니, 당시 조선은 자국과 외세의 엄청난 물결에 휩싸여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있었다.


1896년에 고종은 전 해에 일어난 민비 시해 사건의 여파로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해 있었다.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왕은 나라의 위신을 드높일 필요가 있어서 이참에 자주독립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로 했다. 독립 협회가 설립되었고,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한글이 독립신문을 통해 공용 문자로 반포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게 1443년이었지만 사람들은 이 글을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종 사후 유생들은 한글을 아녀자들이 읽는 글이라고 암클, 용변을 볼 동안 배울 수 있다고 통시글이라고 업수이 여겼다. 한글이 제대로 보급된 건 1945년 해방 이후라 할 수 있었다.


1896년은 3.1 독립 선언서를 미국에 알린 UP통신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도착한 해이며, 프랑스 철도회사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선교사 헐버트가 아리랑을 채보해 영문 잡지에 발표한 해이다.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이 무렵 조선을 네 차례(1894~1897)나 여행했다. 그녀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인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잘 생기고 힘이 세고 명민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왜 저렇게 게으르고 더럽고 가난하고 무기력할까?”  

하지만 그녀는 시베리아 러시아 정부 하에 있는 한국인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안정된 정치 상황에서 주체성과 독립성, 영국인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들로 변해있었다.




 AI인간애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재익은 다말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초 단위로 다른 장소에 저장되는 의식. 미래는 우리 죽지 않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하는 의식.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고 항상 비정하게 앞으로만 전진해서 번영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의식이 눈앞에 있었다. (…) 인생이라는 잔인한 농담. 우리는 목적도 규칙도 모르고 그 속을 떠돈다. 이제 인간은 패배자다. 더 우월하고 유능한 세력에 부속당하여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 p66


인공 지능은 인간을 모방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공 지능은 인간을 추월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게 이도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문자는 이도 밖에 없었다. 이도 덕분에 인공지능은 인간을 추월했고, 모방은 창조로 이어졌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현실 자체가 언어습관의 기반 위에 올라가 있다. 숫자를 하나 둘, 셋 밖에 세지 못하는 민족에겐 넷이란 수가 없는 것처럼.


재익은 8년 전 탐사에서 이 완용을 죽이지 못했다. 만일 성공했더라도 역사가 달라지는 건 없었으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완용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였다. ‘이완용 패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 생산의 한 양식이었다.
이데올로기는 특정 파벌의 이익을 국가와 민족의 보편적인 이익으로 위장한다. 그래서 지배 계층의 이권을 공유하기에는커녕 착취를 당하고 있는 종속 계층도 열렬히 집권자를 지지하게 한다.
이 종속 계층은 속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구체적인 계획과 욕망을 가지고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완용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보면서도 믿지 않는다. 한 사회의 견고한 자기기만이 이완용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모두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대중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대중이 자기 시대를 넘어 미래를 보아야 한다. P234~235




특이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철벅이, 날탕패, 만인계 노름꾼, 신내림을 받은 무당, 언어 연구가, 부두 하역꾼, 시간 여행 탐사자.  


나는 '날탕패'에 관심이 갔다. 날탕패는 떠돌아다니는 소리꾼이다. 작가가 날탕패의 정신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날탕이란 말은 아무것도 없는 허풍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날탕을 자처하는 철저한 자기부정,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밑바닥 인간의 행동 의지가 날탕패 정신이었다. p170


작가는 날탕패를 빈털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날탕패란 아무것도 없지만 겉은 번지르르한, 적어도 겉으로는 멋지게 반짝이는 사람들이니 쿨 피플 Cool people이라 여겨야 한다고 강변한다.

19세기 서구인 앞에서 동양인이 그랬듯이 21세기에는 인공 지능 앞에서 인간이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날탕패들은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포지션이, 인간이라는 위치가 그 자체로 빛난다는 것을 그들의 인생으로 증언한다. 인간이라서 빛나는, 이것이 날탕패의 정신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이인화란 이름은 염상섭의 『만세전(1924년)』에서 가져온 작가의 필명이다. 작가의 원 이름은 유철균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165년이란 미래와 과거의 시간을 오가듯 몇 년간을 산을 다니거나 안동에 가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A4용지에 하루 한두 장씩을 꼬박 썼다. 2020년에 1500장의 초고를 완성했고, 80%를 줄인 205쪽을 2021년에 내놓았다.


"나는 5년 전부터 외톨이가 되었다. 직장도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일절 끊어져서 나와 사회 사이에는 무엇 하나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번민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 걷는 새벽길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까지 훤히 꿰뚫려 보였다."

작가의 말이다.



#2061,이인화, 스토리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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