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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23. 2021

기억의 공간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 도쿄· 서울』전진성 지음 , 천년의 상상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 도쿄· 서울』의 저자 전진성은 베를린에서 이십 대를 보냈다. 도쿄에 갔을 때 그는 어딘지 도쿄가 베를린을 닮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에 지은 서울의 건물들을 보며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이 세 도시에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이 책은 역사학자인 저자가 건축에 관해 쓴 글이다.


건축은 공학적 기술이기에 앞서 하나의 담론이며 정치적 테크놀로지이라며 그는 책에서 대륙을 건너 얽힌 도시의 계보를 밝혔다. 이 책은 그가 2005년부터 10 년간 공부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다.


조선 총독부 청사가 민주 공화국의 심장부로 군림하다가 갑작스레 식민지의 수치스러운 유산으로 척결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경복궁이 민족의 성소로 부활했다.

이런 정치적 결정에 저자는 의문을 표시한다.


사라진 중앙청 자리, 민족 수난의 본거지에서 저자는 아테나 여신을 떠올렸다. 중앙청은 파르테논 신전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모방’이 아니라 ‘희화’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구 대도시는 기억의 환경이 서서히 와해되면서 조심스럽게 대체되는 반면 식민지였던 도시는 기억의 환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민족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거야 반대가 있을 수 없겠으나 이미 파괴된 왕궁을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을까? 왜 민주국가에 왕궁이 필요한가? 미래를 위한 관광 사업인가? 이 두 사건은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우리를 짓누른다. 식민 지배의 유산, 상이한 문화의 충돌, 민족 정체성의 균열이라는 역사적 문제.




1871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서양 국가의 골격을 파악해 일본에 도입하려고 대규모의 사절단을 구미 각국에 보냈다. 우리나라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26년 전 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 사절단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2년간 각국을 탐방하며 일본에 필요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취했다.


영국으로부터 산업, 철도, 해군에 대한 지식을.

프랑스로부터 경찰, 법률, 교육, 병법을.

프로이센으로부터 군제를.

미국으로부터 개척지 농법을 가져왔다.


일본은 국가의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식민지는 본토보다 진일보한 기술과 법제를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독일은 중국 칭다오에 본토보다 더 독일스러운 건물들을 지었다. 토착성은 부인되고 폭압적 방식으로 도시 계획이 관철되었다. 독일에 이어 칭다오를 접수한 일본은 독일 건축가를 데려다 도쿄에 건물을 지었다.


1910년 일본은 경복궁 앞에 조선 총독부 신청사를 세우기로 했다. 일제의 침탈 이전에 경복궁과 광화문은 실제 성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체의 식민 통치가 이곳을 성역으로 만들었다.


청사 설계는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드 라란데에게 맡겨졌다. 조선 호텔도 그의 작품이다. 조선 호텔은 대한제국의 성역인 원구단을 허물고 그 축대가 있던 자리에 지었다. 이 호텔에 투숙했던 일본 건축 평론가가 호텔 뒤뜰로 변해버린 황궁우皇穹宇를 보고 조선 총독부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는 경복궁을 훼철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915년 조선물산진흥회가 경복궁에서 열렸을 때 조선인들은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 경복궁 훼철은 조선인들의 전통과 자존심에 먹칠한 민족적 탄압이었으나 근대적 국민이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식민화와 근대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청사의 건축을 맡은 게오르크가 급작스레 사망하자, 후임 노무라 이치로가 설계를 물려받았다. 그는 박길룡 등 7명의 조선인 건축가를 참여시켜 설계를 마무리했다. 설계도 완성 후 10년이 지난 1926년 전 일본 제국 영토 안에서 가장 큰 건물이 식민지 도시 경성에 출현했다.


독일은 바람직한 제국의 이미지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찾았기에 독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은 베를린에 그리스 건축술을 계승한 신고전주의 건축물을 세웠다. 총독부 청사는 독일의 제국 의회 의사당을 모델로 삼았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총독부 청사는 싱켈식 테토닉(건축을 어떻게 통합적 관계 속에서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시작점)의 식민지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압도적 규모와 외관을 지닌 청사는 쇠락한 왕궁의 정전인 근정전 앞에 서서 옛 건물을 왜소하게 만들었고 옛 육조거리와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청사가 완공될 무렵에 광화문이 철거되었다. 창경궁은 동물원이 되었고, 덕수궁은 고종의 거처였기에 그나마 축소된 상태로 살아남았다.


1945년 미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날 이 건물에서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건물은 미군정 청사가 되어 성조기가 나부꼈다. 3년이 지나 이곳에서 제헌 국회가 열렸고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어 중앙 정부의 청사가 되었다. 명칭도 중앙청으로 변경되었다.

총독부 청사는 왜색이 없는 근대적 외관 때문에 제국이 패망한 후에도 본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광화문은 제대로 고증을 거치지 않아 경복궁의 중심축과 비뚤어진 채 복원되어 중앙청의 정문 같아졌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족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변모되었던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다. 민족의 자존심과 정기 회복을 명분으로 마치 쫓기듯 건물을 허물어버렸다.


풍수론과 쇠말뚝으로 지맥을 끊는다는 일제 단맥설이 갑작스레 힘을 얻어 노태우 정권 하에서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졌고, 2006년 광화문광장 조성 사업도 본격화되었다. 총독부 청사와 경복궁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청와대는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이곳에 총독 관저를 지었다. 관저는 에스파냐 풍 청기와를 올린 지붕이 특징이다. 경무대라는 명칭은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썼고,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이 장소는 역사적 피란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이곳은 가장 은밀한 곳에 도사리고 앉아 만물을 응시하는 권력 그 자체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이곳은 권력의 핵심부다. 총독부 청사와 경복궁은 어쩌면 이곳을 감추는 연막에 불과했던 것 아닐까? 저자는 의혹을 가진다.


책의 끝 부분에서 저자는 작은 희망을 소개한다. 서울 어린이대공원 안 서울 컨트리클럽 하우스는 대한민국 제1세대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했다. 1969년 준공된 건물은 특권층의 놀이 공간이었다. 권력 지향적이고 폐쇄적이었다. 건물은 철거 직전 건축가 조성룡의 제안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태어났다.

꿈마루는 현재의 정치적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과거를 포장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열린 가능성을 찾게 만든다. 이런 곳을 지리학자 하비는 ‘희망의 공간들 spaces of hope’이라 명명한다.   


심상 지리는 거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어떤 장소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왜 베를린, 도쿄, 서울에 등장하는가? 저자는 역사와 건축에 관한 지식으로 설명했다.




책을 덮은 후 나는 조선중앙총독부 건물이 사라진 빈 터를 떠올렸다. 그곳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곳은 정치적 의견을 내는 시위대의 천막이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사의 파괴 후 모습을 찾아봤더니 부서진 건물의 첨탑이 천안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었다. 동그마니 남은 첨탑은 초라하고 왜소해 보였다.


독립 기념관에서 첨탑을 보는 사람들은 일본을 비난한다. 나는 그들과 생각이 다르다. 총독부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고, 주인이 어떻게 바뀌었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떠올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공간과 홀로 남은 첨탑이 무모한 분노의 산물로 여겨질 뿐이다. 나는 마음이 쓰렸다.


6세기 비잔틴 건축의 걸작 성 소피아 성당은 터키의 지배 하에서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었다가 현재는 터키 이스탄불의 박물관으로 남았다.  박물관 도서관, 기념 공원처럼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공간은 제국주의 같은 지배적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해 왔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기억에 개입하여 갈등과 상처를 재현하는 공간으로 거듭남으로써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서 기존의 권위와 위계를 무너뜨린다.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와 독재, 개발을 겪은 서울의 도시 공간과  그 안의 다양한 건축물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채워갈 것인가.


"거기에 총독부 건물을 짓는 게 말이 돼? 없애기를 잘했지."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이도 있다.

"경복궁 앞에 총독부 건물이 국립 박물관으로 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나지 않아."


건물이 사라지면 우리의 기억도 희미해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해방 이후 미 군정청, 중앙청, 인민군 청사, 국립 중앙 박물관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던 순간을, 건물 앞을 메운 군중과 9.28 수복 당일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회상했을 텐데.

한옥의 대들보로 살아남은 폐가의 목재처럼 우리의 과거 역사도 현재성을 가질 텐데.  


“부수고 짓는 행위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께서는 그 점을 숙고하셔야 합니다.”

전진성,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띄우는 건축 서간,『공간』(1991.1.2)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 도쿄· 서울』전진성 지음 , 천년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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