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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r 20. 2021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슬로푸드



전보다 육류 구입이 줄었다. 대신 무, 버섯, 파프리카, 브로콜리, 우엉, 연근 같은 채소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육식을 줄이려 한다.


오일장에 갔더니 소나무에서 자란 표고가 있었다. 햇빛에 말리고 싶다 하니 아주머니가 일반 표고 대신 이걸 권했다. 향이 강하고 만지 폭신폭신하다. 찢으면 송이버섯처럼 결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카트에 가득 차게 장을 봤다. 지나가던 지인놀란 눈으로 오늘 손님 치르냐고 물었다. 많이 산 건 오랜만에 장을 보러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못하게 붙든 봄 채소 탓이기도 했다. 


겨울 무가 장에 쏟아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든가 보다. 큼직한 게 3개에 2천 원이니 안 살 수 없다.

무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많다. 무 장아찌, 무 말랭이, 무나물, 무 무침. 무 옆에 회색 연근이 놓여 있다. 이것도 3개에 만 원이다. 가늘게 편 썰어 말린 연근이 떠올라 나는 이것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연근 샐러드, 연근 조림, 연근 솥밥을 하고 싶다. 새파란 오이를 사려는데, 아주머니가 옆에 놓인 하루나를 권한다.


-봄에는 이걸 먹어야 해.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봄 냄새가 물씬 나지.

아주머니는 내게 하루나를 먹어봤냐고 묻는다.


대구에선 하루나를 시나나빠라 부른다. 제주에선 유채라 부르고 여기에서 기름을 짠다. 이맘때 여린 하루나가 나오면 어머니는 얼갈이랑 섞어서 김치를 담았다. 홍고추 갈아 넣고  버무린 하루나 김치를 남동생이 좋아했다. 러고 보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음식은 대부분 남동생과 연결된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다. 그 말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는 말과 같다. 콩잎 김치, 북어포 볶음, 산나물 무침, 야채 겉절이는 모두 남동생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남편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 사위가 처갓집에 온 첫날 머니는 그가 뭘 좋아하는지 탐색했고, 이후부터 밥상에 돼지고기 수육과 약밥을 빠트리지 않았다. 만들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장에서 사다 놓았다.


김치를 담기엔 애매한 2천 원어치 하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왜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없을까,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바로 답을 찾는다. 다섯 남매의 가운데 딸로 태어나면 뭐든 가리지 않고 먹게 된다.



하루나



양파, 당근, 샐러리를 자주 산다. 이 세 가지 재료는 야채수프의 기본 재료다. 야채수프를 그간 세 번 끓였다. 첫 번째는 잘 만들었고 두 번째는 잘못 만들었다. 왜 항상 두 번째를 망치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재료인 토마토와 귤로 잼을 만들 때도 그랬다. 이 차이가 뭔가 생각해보니 어설픈 자신감 때문인 것 다. 세 번째로 야채수프를 만들 땐 레시피를 보고 처음처럼 신중하게 만들었다.


이 음식은 그야말로 슬로 푸드다. 미리 렌털 콩을 불려 놓고. 양파를 타지 않게 충분히 볶는다. 채소를 넣는 순서를 잘 지켜야 한다. 썰어놓은 채소를 보면 완성된 수프에 비해 재료가 많아서 깜짝 놀랄 정도다. 양파, 당근, 샐러리, 단호박, 푸른 호박, 토마토가 들어간다. 월계수 잎과 허브를 마지막에 넣는다. 팔팔하던 녀석들이 볶이다가 마침내 숨이 죽어 어우러진다. 한 냄비 만들어놓으면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다. 아침마다 한 그릇씩.


야채수프 (#하루하루문숙 레시피 참고)



친구가 지난달에 경기도 인근으로 이사를 갔다. 그녀와 나는 이십 년 넘게 다른 곳에선 살 수 없으리란 생각으로 이곳에서 살아왔다. 남편의 퇴직을 계기로 그녀는 이사를 결심했다. 남편의 취미인 낚시를 할 수 있는 강이 있는 곳, 결혼한 딸과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기로 했다.


-이젠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로 일 년 넘게 집에만 있었더니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살까 싶던 게 슬그머니 정리가 됐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여러 모임이 정리되면서 어느 틈에 생활이 고요해졌다. 생활이 바뀌면서 식생활이 달라졌다. 지난번에 읽은 조너사프란 포어의 『우리가 날씨다』 영향을 미쳤다. 책 한 권이 식생활을 바꾸게 게 신기하다.  활동이 줄어 예전처럼 음식을 먹으면 체중이 늘고 몸이 거북해져 전보다 채식을 선호하게 된 것도 이유였다.


채소로 만든 맛있는 요리가 없을까? 찾아보니 취향에 맞는 음식들이 눈에 띄었다. 만들기 간단한 요리를 좋아한다.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특징 있는 한 가지 요리를 만들어 먹게 되었다.



양배추 달걀 볶음밥(기름에 양배추를 볶다가 밥 얹고 달걀 두 개 깨트려 볶음)


버섯 무 솥밥( 불린 쌀에 표고, 다시마, 연근 말린 것과 무채. 달래장 곁들임)



무 장아찌(소금과 올리고당에 절인 후 간장, 젓갈, 소주를 넣는다.)



통에 오이를 담고 소금 후추 넣어 흔든다. 같은 방법으로 무는 간장 한 숟가락, 파프리카는 간장에 올리브유 넣고 흔든다.


소금 후추 뿌린 후 구운 두부 요리



두부와 오이를 반찬으로 저녁을 먹다가 추사 김정희의 글이 떠올랐다.


'대팽고회(大烹高會)'는 김정희가 세상을 뜬 해인 1856년에 예서로 쓴 대련 형식의 작품이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손녀.


본문의 양편에 협서(脅書)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촌사람이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즐거움이자 최고의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 한 황금도장을 찬 고위 관직자로서 사방 1장 넓이의 밥상머리에서 식사 시중을 드는 첩이 수백 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고농을 위하여 쓰다. 과천에 사는 71세의 노인이."



추사 김정희, 대팽고회 (사진 제공, 간송미술관)



대팽고회에는 '평범한 일상이 삶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는 노(老) 서예가의 예술관과 인생관이 응축되어 있다.




그렇다고 채소만 먹지 않는다. 이따금 고기를 먹는다. 손톱이 옆으로 갈라지거나 기운이 없고 어딘지 헛헛한 날에는 충분히 고기를 먹어야 한다. 채소만 먹고 살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것저것 맛있는 채소 요리를 먹다 보니 자연스레 육류 섭취가 줄었다. 나는 이 정도의 작은 변화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채반에 늘어놓은 표고와 연근, 무가 잘 말랐다. 말리는 동안 다행히 비 오는 날이 없었다. 채소를 말려본 이들은 안다. 초기에 비 오는 날이 하루라도 있으면 말리기를 접어야 한다. 채소에 바로 곰팡이가 핀다. 인간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날씨에는 무기력하다. 인간은 날씨를 이길 수 없다. 햇볕에 말린 표고와 무는 비타민 D가 열 배 이상 늘어난다.


채반에 널린 표고를 뒤집으며 나는 71세, 죽음을 앞둔 과천 노인의 말을 떠올린다. 봄볕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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