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영 작가의 『새엄마 육아일기』를 읽고 하루가 지난 오늘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삼십 대 후반에 오 작가가 새엄마가 되었듯, 나는 쉰 중반에 할머니가 되었다. 더 오래전 이십 대 후반에 아이들을 낳아 키울 땐 별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은 당연한 듯 태어났고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데 마흔여덟부터 쉰 중반까지 양육의 부담이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 후 손자들을 맞았을 때 나는 이전과 다른 여러 감정을 맛보게 되었다. 녀석들을 생각하는 지금 나의 눈꼬리는 처지고 입 가장자리는 올라간다. 아마 누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하회탈을 떠올리지 않을까.
아들 준성이가 오 작가에게 미친 영향을 나는 두 손자가 내게 한 역할로 그지없이 실감할 수 있었다. 준성이 자리에 두 녀석을 데려다 놓으면 됐다.
작년 어느 날 저녁, 성당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작은 녀석 생각이 났다. 녀석은 6년 전 내게로 왔고 4년 전 엄마에게 갔다. 녀석을 딸네 집에 데려다주고, 다음날 내려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녀석이 어디선가 서랍을 뒤져 목도리와 양말을 꺼내 오는 게 아닌가. 함께 간다며. 내가 자기를 두고 가리라는 걸 눈치챈 거다.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아기가. 안아주고 눈을 맞추고 이제 헤어져야 하고 이곳이 너의 집이라는 말을 해준 후 나는 재빨리 녀석 손을 떨치고 집을 빠져나왔다. 문 밖에 서서 나는 한참이나 녀석의 동물 같은 울음을 듣고 서 있었다.
녀석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온갖 감각이 되살아난다. 세상이 분홍빛으로 바뀐다. 성당에 앉아서 녀석을 떠올리는 데, 갑자기 내 주위를 감싸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 사랑을 줬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녀석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성당을 나와 아파트 상가 앞을 지나며 함께 걷던 친구에게 이런 여러 감정을 말했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다 보면 차츰 자신을 풀어내게 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난 일들, 감정들.
몇 년 전 서너 명이 소설 쓰기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안에 삼십 대 새댁이 있었다. 써오는 글들을 읽다 보니 차츰 본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은 뿌리가 깊다. 위로 위로 캐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의 시니컬한 태도, 차가운 표정, 도를 넘는 폭음은 사회적 명망가였던 그녀의 아버지가 원인이었다. 쉴 줄 모르고 부에 집착한다든지, 자식에게 경쟁을 강요한다든지,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분노 같은 것들. 강퍅한 부모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처 입은 아이가 동그마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대 여섯, 많은 집은 예닐곱도 있었다. 삶은 척박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겨를이 없었다. 폭력이든 방임이든 자기들 식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렇다고 그 안에 사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사랑을 알게 되면,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메마른 사막 같았던 기억 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빛 한 줄기를 찾아낼 수 있다.
남의 이야기는 쉽게 쓰지만 자신의 가족사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분노의 순환을 끊은 게 아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동의한다. 손자를 키운 후 나는 조금 말랑말랑해진 것 같으니.
아들을 키운 기억을 되살려 육아일기를 쓴 그녀처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고 싶다. 이제 너무 희미하지만.
스페인어 번역가로 오래 활동한 덕분인지 작가의 문장이 매끄럽다. 장문과 단문이 적절히 섞여서 읽으면 리드미컬한 운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작가가 옆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