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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8. 2021

할머니의 뇌물

햇빛을 보지 못한 토마토는 익지 않는다



아파트 옆에 토마토와 오이를 키우는 과수원이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이 과수원에서 토마토를 사 먹는다. 집에 가져온 토마토 봉지를 열고 코를 갖다 대면 뜨거운 햇살의 열기와 시큼한 향내가 훅 다가온다. 만원 어치 정도 사서 잘 씻어 식탁에 올려놓으면 오가며 입 심심할 때 먹기로 토마토만 한 게 없다.


전날, 토마토를 먹다가 일곱 살 큰 손자 생각이 났다. 어찌 된 일인지 큰 녀석은 토마토를 좋아하고 한 살 아래 작은 녀석은 수박을 좋아한다. 두 녀석은 제각기 좋아하는 것만 먹으려 한다. 태어나서 각자 다른 집에서 자라서 그럴까? 큰 녀석은 사돈이 3년을, 작은 녀석은 친정 엄마인 내가 2년을 키웠다.


토마토를 사서 큰 녀석에게 보내려고 다시 과수원에 갔다. 토마토 옆에 싱싱한 오이가 놓여있었다. 꼭지에 아직 노랗게 시든 꽃이 붙어 있는 싱싱한 오이를 몇 개 사면서 나는 상품성은 없지만 과수원에서만 볼 수 있는 꼬부라진 오이도 덤으로 얻었다.

작년 여름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이 과수원에 놀러 갔다. 복더위라 비닐하우스의 실내 온도가 40도가 훌쩍 넘었는데 녀석들은 저만치 자기 키보다 큰 토마토 가지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니 녀석들은 과수원에 다녀간 걸 이미 잊어버렸을 것 같다. 큰 녀석에게 토마토를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이건 일종의 뇌물이다.


지난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아이들이 놀기에 무척 좋았다. 아파트에 사는 두 녀석은 자기 집에서 수시로 ‘조용히’라는 말을 듣고 산다. 아랫집에서 계속 연락이 온다. 코로나가 심해서 유치원도 문을 열지 않았다. 집에서 제대로 뛰어다니며 놀 수 없으니 큰 녀석은 핸드폰을, 작은 녀석은 아이패드를 계속 들여다본다. 나는 그게 안타까워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게임 시간도 정해서 규칙적으로 하게 시켰는데, 잘 되지 않았다. 큰 녀석은 게임을 하고 싶어서 자꾸 할머니 눈치를 봤다.

나는 매일 오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갔고, 오후에 남편이 퇴근하면 다시 데리고 나갔다. 두 녀석은 하루에 두 번 공원과 놀이터에서 눈썰매도 타고, 눈 쌓인 미끄럼틀에서 슬라이딩도 했다.


작은 녀석은 우리 집에 오면 은근히 기가 산다. 살았던 걸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할머니 집을 익숙하게 여긴다. 녀석에겐 우리 집이 고향 같은지 모른다. 큰 녀석은 할머니 때문에 자기 집에서처럼 동생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내가 큰 녀석에게 뇌물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사위가 두 녀석을 데려가려고 온 날 저녁 밥상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다.

여섯 살,  일곱 살 두 남자아이를 주간 돌보는 건 남편이 도와줘도 내겐 무척 힘든 일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는 오래전에 접질린 다리를 다시 절기 시작했다. 영하의 추위에 놀이터에 한 시간 이상 서 있는 게 무리가 되었다. 항상 녀석들을 보내고 나면 다음에는 열흘을 절대 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다리를 저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내가 욕심이 많다고 나무란다. 2 프로만 삼가라고 조언한다.

이제 돌보는 시간이 끝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위가 녀석들을 데리고 올라가면 된다.


식탁에 음식을 늘어놓고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큰 녀석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할머니는 동생만 좋아하죠?

-으응….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마치 마지막 라운드를 향해 달려가던 권투 선수가 상대의 기습 어퍼컷을 맞은 기분이었다. 핑! 머리가 돌면서 나는 쓰러졌다. 케이오 패.


응, 이라는 대답은 긍정이었다. 나는 아무 방비 없이 펀치를 맞았다. 그때 조금 덜 지친 상태였다면, 다리가 덜 아팠더라면 조리 있게 마음 상하지 않게 녀석의 질문에 잘 대답했으리라.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사위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꼬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생각이 나서 나는 녀석에게 뇌물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어린이날에 이미 1 차 뇌물이 갔다. 우리 집에 있을 때 몸에 좋지 않다고 사주지 않던, 슈퍼에서 녀석들이 사달라 집어 들던 온갖 봉지 과자를 온라인 마켓에서 듬뿍 사서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토마토를 보니 다시 녀석이 떠오른 거다. 토마토를 조심스레 담고 위에 꼬부라진 오이까지 넣은 후 뚜껑을 닫기 전에 나는 녀석에게 편지를 썼다.





작년 여름 딸이 일주일간 아이들을 맡기겠다고 할 때 나는 이 주일을 돌보겠다고 했다.


-아이고, 괜히 인심이나 잃지 말고 놀아주기나 잘하세요.

이웃의 훈수에도 불구하고 나는 큰 녀석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었다.


여섯 살이니 한글을 익히면 엄마 손이 못 가도 덜 심심할 거라는, 딸도 좀 편할 거라는 얄팍한 생각이 있었다.

녀석은 떠듬떠듬 한글을 읽다가 집에 갔는데, 일 년이 지난 얼마 전 비틀비틀하게 한 문장의 글을 쓴 걸  딸이 자랑스레 보여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녀석은 이제 읽을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은 별게 아니다.


"어제 할아버지랑 토마토를 먹다가 문득 너를 생각했단다. 네가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니. 그래서 토마토를 사서 보낸다. 토마토를 많이 먹으면 아픈 사람이 없어진대. 옆에 넣은 오이도 아작아작 씹어 먹으렴.

엄마, 아빠, 할머니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에게 할머니가 보낸다."


이런 내용이다. 봉투 겉면에 동생에게 큰 소리로 편지를 읽어주기 바란다는 글도 적었다.

다음 날 저녁 나는 토마토를 손에 쥐고 앙, 하고 먹는 녀석과 통화를 했다. 우리는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사랑에는 여러 빛깔이 있다는 걸 녀석은 이해했을까?


며칠 후 과수원에 갔더니 수확한 토마토가 없었다. 그간 계속 비가 내렸다. 햇빛을 보지 못해서 토마토는 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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