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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31. 2021

칼국수를 먹다 번진 생각

인터불고 호텔과 동촌 유원지



점심으로 밀키트로 파는 장칼국수를 끓였다. 밀키트 제품은 요리법이 간단하다.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물에 넣고 끓이면 된다. 오래전 먹었던 그 칼국수와 맛이 비슷할까? 장칼국수를 산 건 단순히 맛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칼국수를 먹다 보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돌아가신 엄마의 좋았던 어느 시절까지 흘러갔다.


예전에는 이런 칼국수를 파는 가게가 군데군데 있어서 싼 값에 자주 사 먹을 수 있었다. 그 많던 가게가 어느 틈에 사라졌다.

지난해 가을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친구가 아들 결혼식을 치렀다. 아들이 중학교 입학할 무렵 친구는 남편을 잃었다. 전국에서 모인 우리는 친구의 바로 뒷자리에 모여 앉았다. 혼주석에 혼자 앉게 된 친구에게 힘을 실어준다며. 식 말미에 신랑이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모두 순서대로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야 했다. 식을 마치고 호텔 커피숍에서 차를 마실 때는 좀 전 결혼식의 여운으로 느슨하고 멜랑콜리한 기운이 우리들을 감쌌다. 전에는 못 보던 호텔이라 말했더니, 한 친구가 인터불고 호텔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호텔을 세운 이는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타던 남자였다. -친구의 말을 듣고 궁금해진 나는 집에 돌아와서 인터불고 호텔과 그 설립자를 찾아봤다. 그는 현재 호텔 사업을 접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돈을 벌어서 고향인 대구에 뭔가 좋은 일을 한다는 취지로 호텔을 지었다. 친구 말로는 이따금 호텔에서 그 부부를 봤는데 작은 차를 몰고 다니며 주방에 인력이 부족하면 달려와 주방일을 거들 정도로 소박하고 건실한 사람이었다 했다.

부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텔은 계속 수지가 악화되어 마침내 인수할 사람을 수소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호텔을 인수한 이는 당시 대구에서 칼국수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작은 칼국수 가게를 하던 지인이 망해서 엉겁결에 넘겨받았다나. 그렇게 시작한 칼국수 장사가 전국 체인을 만들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모은 돈으로 결국 인터불고 호텔을 인수 헸다는 설이었다.

-사천 원 짜리 칼국수를 몇 그릇 팔면 이런 호텔을 살 수 있을까?
친구가 호텔 로비를 둘러봤다.

호텔의 야외 벤치에 앉으니 말끔하게 정비된 강과 건너편에 높이 들어선 아파트가 보였다. 이곳이 동촌 유원지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릴 적 무더운 여름날이면 이따금 동촌 유원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변한 그곳을 알아볼 수 없었다.



동촌 유원지



기억 속의 그곳은 질퍽질퍽했다. 소리 높여 호객하며 아이스케키를 파는 장사꾼. 팬티만 입고 뛰어놀던 새까만 머스매들. 리어카와 키 낮은 허름한 가게. 모처럼 데이트하러 나온 연인들. 동촌 유원지는 팍팍한 한 삶 가운데 잠시 숨 쉴 수 있는 여유를 주던 어수선하고 자유로운 마치 꿈속 같은 강변이었다. 엄마의 사진첩에서도 볼 수 있었던.


사진 속의 엄마는 결혼 전, 이십대로 보였다.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느라 한껏 멋을 부린 풍성한 스커트 차림으로 보트의 노를 저으며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머리에 이상한 수건을 동여맨 수영복 차림으로 이모들과 어깨동무하며 나란히 서 있는 사진. 혼자서 유유하게 고무 튜브를 타며 발로 물을 튕기는 사진. 빛바랜 사진 속의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건 어느 인간의 일부분인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은행 일을 마치면 친구랑 춤을 배우러 갔어. 춤을 추다 보면 속 적삼의 등판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
엄마가 말해준 몇 안 되는 이야기다.

엄마는 자기에 관해서 잘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 한들 누가 궁금했을까. 귀 기울여 들어줬을까.

내가 아는 엄마는 우리를 키우던 시절의 모습뿐이다. 그 무렵 사진 속의 엄마는 살이 많이 쪘고 지쳐 보였다. 둥근 밥상 앞에 퍼질러 앉아있는 엄마 무릎에 남동생이 매달려 있었다. 그릇이 바닥에 나뒹굴고 밥상에는 음식이 흩어져 있는데 그런 상황을 추스를 기운도 없는 모습.


다섯 남매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엄마는 양계장을 꾸리며 남자처럼 일했다. 셈이 정확했고 남에게 빚지지 않았다. 일꾼으로 고용한 떠돌이 청년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았다. 엄마는 물려받은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남편 때문에 시댁에서 대접받지 못한 맏며느리였지만 열 살 남짓 위인 서 시어머니에게 할 도리를 평생 멈추지 않았다. 철철이 용돈을 챙겨 보내는 일 같은 것. '보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바보 같아서 슬며시 억울해 했다.

예순이 넘어서 엄마는 대구 시 주최  시니어 배드민턴 대회에 나가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나중에 엄마는 그 배드민턴 채를 내게 줬다. 아이들에게 주라며. 그때 엄마가 고등학교 다닐 때 테니스를 즐겨 쳤다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엄마가 돌아가실 무렵이 되어서야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조한 마음에 여기저기 엄마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그나마 미국에서 이십 년 만에 들어온 막내 이모가 식사 자리에서 잠깐 이야기해주다 말았다. 일곱 여형제 중 남자 같았던 한 여자의 영웅담 같은 이야기. 아쉽게도 그 자리의 주인공은 이모여야 해서 나의 질문은 주변의 눈치에 그치고 말았지만.


칼국수를 먹다가 인터불고 호텔, 동촌 유원지에서 놀던 아가씻적의 엄마까지 생각이 번져갔다.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엄마, 이야기해줘. 어릴 적. 그리고 아가씨 때. 무엇을 좋아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곁에 있으면 물어볼 텐데.


칼국수는 매워서 속이 얼얼했다. 그 맛에 먹는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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