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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07. 2021

손자들에게 보낸 그림책

갈망



새벽에 잠이 덜 깬 상태였는데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이걸 기억할 수 있을까, 어디 메모를 해야 하는데, 생각뿐 잠에 취해서 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그 문장을 떠올리려 하니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새벽에 문장이 떠올랐을 때, 나는 아, 이런 게 '씨앗 문장'이구나. 이걸로 글을 엮을 수 있겠구나 여겼다. 그럼 얼른 일어나 불을 켜고 메모지를 당겨 문장을 적었어야 했다. 의지박약 한 나는 이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가만 곰곰 생각하며 잠을 이어가고 말았다. 이전에 몇 번 그렇게 꿈결에 떠올라 적어놓은 문장이 아침에 일어나서 읽었을 때 별 것 아니었다는 경험도 잠을 거들었다. 그 결과 현재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꿈속에서 내게 주어진 문장은 무엇을 의미한 걸까? 어쩌면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 아니었을까?


『개미』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청소년기부터 계속 글을 써왔다 했다. 그런 지속적이고 꾸준한 글쓰기가 그의 창의력의 원천이라나.


“16세 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4시간 30분씩 글을 써 왔어. 규칙적인 리듬이야말로 예술가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한다네.”
                                                                            (2021,6,7. 동아일보 인터뷰, 이호재 기자)


창의력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베르베르의 말은 무척 유혹적이다. 오늘부터 나도 무조건 오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 볼까? 이것저것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쏟아내다 보면 창의력이라는 신선한 결과를 얻게 될까?

몇 주간 심드렁한 글쓰기를 이어왔다. 쓴 글들은 대부분 짧은 단문이어서 자주 드나드는 SNS에 쉽게 쏟아내곤 했다. 그런 여파인지 모른다. 글을 쓸 수 없게 된 게. 굵고 진중한 글을 쓰는 데는 저장된 묵직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의 에너지는 섣부른 퍼 나르기로 고갈되어 버린 것 같았다. 사회 현상에 대한 관심도 한몫했다. 뒤숭숭한 정치 상황. 코로나 사태. 세상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다 보니 깊은 사고를 하게 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것 같다. 쓸모없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판단도 중심이 없이 갈팡질팡한다. 그래서 책을 손에 잡는데, 글쓰기와 연결되지 않은 책 읽기도 허망하긴 마찬가지였다.


조간에 책을 소개하는 칼럼이 있는데, 나는 소개된 책 보다 작가가 어릴 때 읽었다는 그림책에 더 마음이 갔다. 시인인 헤더 크리스털이 에세이 『크라잉 북』에서 ‘내가 지금까지 1000번은 읽은 어린이 그림책’이라며 책을 소개했다. 책은 레오 리오니의 『파랑이와 노랑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그림책 두 권을 찾아 손자에게 배송시켰다. 다른 한 권은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레빗 시리즈 전집』이다. ‘피터 레빗’을 떠올린 건 얼마 전에 읽은 진회숙 작가의 『영화 속 영국을 가다』때문이다. 책에 베아트릭스 포터가 즐겨 찾던 호수가 나오는데, 나는 호수보다 ‘피터 레빗’에 새삼스레 관심이 갔다.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손자들에게 적합한 책을 찾은 적이 있는 데 수십 권을 뒤진 후에야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서점에 가서 아이들 책을 고를 때도,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책은 너무나 많은데.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책은 드물었다. 글이 너무 길어도, 내용이 딱딱해도 아이들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때 ‘검은 고양이’ 책을 구할 수 있어서 며칠 계속 그 책만 읽어준 기억이 난다. 널리 알려져 검증된 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글을 아직 읽지 못하는 녀석에게 『파랑이와 노랑이』, 글을 제법 읽는 큰 녀석에게 『피터 레빗 시리즈 전집』을 각자 책의 주인을 지정해서 보냈다. 인터넷 서점에 책의 ‘미리 보기’ 기능이 있어서 좋았다. 글자 수와 내용을 살펴봤다.


우리 아이들에겐 책이 많다. 요즈음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얻은 책, 물려받는 책들이 넘친다. 책이 너무 많아서 아이들이 책에 호기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보낸 책 한 권이 아이에게 가슴 깊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핸드폰 만이 아니라 글도 재미있는 상상의 놀잇감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할머니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만, 일종의 욕심이란 걸 알지만, 혹시 이 책이 녀석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른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어이 일을 저질러서 극성 할머니의 대열에 합류했다.


쓰기에 관한 갈망으로 허우적거리다 생각이 아이들 그림책으로 옮겨갔다. 아이들이 글 재미를 알기 바라는 것과 같이, 나의 글쓰기도 제대로 방향을 잡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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