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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29. 2021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2)

흑사병과 르네상스


흑사병이라 불리는 가래톳 페스트는 14세기 이전에 이미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풍토병이었다. 이 병은 숙주인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게 전파되는데, 병에 걸리면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 동전 크기의 갑상샘종(가래톳)이 생긴다. 대부분의 환자가 증상이 나타난 후 4일 내로 죽었다. 24시간 내 죽은 자도 많았다.

14세기 중반 몽골 군이 전쟁에서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상대 진영으로 쏘아 보냄으로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서너 해 동안 유럽 인구의 30퍼센트인 2500만 명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가래톳 페스트가 번졌을 때 서유럽인의 90퍼센트가 농민이었다. 지식인은 소수였기에 과학적 지식은 결여되었고, 치명적인 질병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했다. 엉터리 대중 요법이 횡행했다.


와인을 마셔라, 오줌과 고름을 먹어라. 양파를 많이 먹어라. 심지어 에메랄드를 부숴 먹으면 낫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에메랄드를 먹은 부자들이 죽어나가자, 신실한 이들은 신에 귀의해 문에 십자가를 새겼다.


고백하자면, 코로나 초기에 나도 면봉으로 코 속에 요오드팅크를 바른 적이 있다. 좋은 의도로 작은 병에 든 요오드팅크를 몇 박스  제공한 사람도 있었다. 의사들은 펄쩍 뛰었지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 퍼뜨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공포심을 이용하는 사악한 인간들이 덩달아 날뛰었다. 주로 네덜란드인인 채찍 고행자들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느라 33일과 3분의 1일(그리스도가 살았던 햇수)을 벌거벗은 채 자신을 채찍질하며 돌아다니다가 십자가 모양으로 길 위에 엎드렸다. 그들은 주저 없이 유대인을 해쳤다. 오래전(로마시대) 박해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을 보는 족족 해쳤다.


역병이 돌 때 인간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고립시킨다. 모두가 섬이 된다. 의심, 공포, 절망에 사로잡힌 작은 유령 섬.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역병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믿는 자는 '악마의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므로 학살을 멈추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다행히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가 자국을 유대인의 도피처로 제공했다.


 1349년 보카치오는『데카메론 Decameron』을 쓰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귀족이 역병을 피해 피렌체 교외의 시골로 달아난다. 이들은 10일간 모여서 매일 한 편씩 100편의 이야기를 한다. 데카메론은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전해오는 설화와 민담에서 따온 이야기들로 성과 쾌락에 관한 자유분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흑사병이 휩쓸고 간 유럽은 질서가 무너졌고, 도시는 공동묘지로 변했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과거로 가더라도 이 시대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으리라. 실수라면 모르지만.


『둠즈데이 북』은 코니 윌리스가 발표한 미래 SF소설이다. 현재인 2054년과 과거인 1348년이 교차하며 한 달 남짓 서사가 진행된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도 키브린은 시간 여행을 하다가 기계가 고장 나는 바람에 페스트가 횡행하는 14세기 중세 유럽에 떨어진다. 소설 속에서 현재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과거는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코니 윌리스는 이 소설을 1992년 발표했다. 소설에 사람들이 휴지를 사 모으는 장면이 나온다. 코로나19 펜데믹 초기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작가들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흑사병은 유럽의 인구를 감소시켰다. 유산을 받은 벼락부자가 탄생했고, 부족해진 노동력으로 고민하던 영주들은 농민들의 임금을 인상해야 했다. 임금은 계속 올라갔고 덩달아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도 향상되었다. 흑사병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가 무너진 중세에 아이러니하게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이후에도 흑사병은 사라지지 않고 이따금 출몰했다. 18세기 이스라엘 자파에서 나폴레옹의 1만 2천 명 군사를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갔다.



#세계사를바꾼전염병13가, 제니퍼 라이트 지음, 이규원 옮김, 산처럼

#둠즈데이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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