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와 에이즈
“우리가 춤추면 그들이 걷는다”
1940년대에 소아마비만큼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질병은 없었다. 1890년대 후반 처음 발생한 후, 1916년에는 2만 7천 건, 1952년에는 대략 5만 8천 건이 보고되었다. 1952년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1위가 원자폭탄, 2위가 소아마비였다.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워한 이유는 5세 미만 유아가 감염되고 평생 마비된 채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아마비 감염은 콜레라와 비슷하다. 콜레라처럼 대변에서 발견되는 바이러스가 입을 통해 체내로 침입한다. 감염자가 음식을 준비하다 옮기기도 했다. 20세기에도 아이들은 호수, 물웅덩이, 수영장에서 놀았다. 수영장에 염소가 사용된 것은 1946년이 되어서였다.
1921년 정치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39세 되던 이 해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렸다. 신경세포가 파괴된 후 마비 증상이 온 경우였다. 마비성 소아마비의 치사율은 5~10퍼센트다. 그는 보호구 없이 걷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휠체어를 탄 사진은 보기 드물다. 대공황기여서 국민은 활력 있는 대통령을 원했다. 그가 당선되자 소아마비 환자에 대한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소아마비 환자 가족이 그에게 편지를 썼고 루스벨트는 모두에게 답장을 보냈다. 용감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그들을 격려했다.
루스벨트는 1926년 조지아 웜스프링스 토지 147만 평을 매입해 소아마비 환자 재활원을 만들었다. 비탄에 잠겼던 환자들이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거기에 덧붙여 재활원의 자금이 고갈되자 자신의 생일에 대통령 주재 '생일 무도회'를 열도록 승인했다. 1934년 미국 전역에서 6천 회의 생일 무도회가 열렸다. '우리가 춤추면 그들이 걷는다'라는 슬로건 아래.
정적들은 '루스벨트의 생일만 아니면 언제든 기꺼이 기부하겠다'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1938년 루스벨트는 국립 소아마비 재단이라는 초당파 재단을 설립했다. 소아마비 치료법이 발견되기까지 미국인의 3분의 2가 기부했고, 700만 명이 재단의 자원 봉사자로 활동했다. 이 재단이 조너선 소크의 백신 연구에 자금을 지원했다.
박해를 피해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소크는 191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2년 후 뉴욕에서 2300명이 소아마비로 죽었다. 그가 네 살 때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다. 신동이었던 그는 열다섯 살에 뉴욕 시립대학에 합격했고, 4년 후 의학대학원에 진학했다. 그가 이 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아서였다. 예일대의 경우는 한 해에 다섯 명까지만 유대인을 뽑았다. 20세기 초에도 반유대주의는 극심했다. 후일 백신을 개발한 소크가 미국을 좀 더 관용적인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소크를 소개할 때 늘 빠지지 않는 그의 과오가 있다. 소크는 1938년 미시간대학 학부장인 프랜시스와 인플루엔자 백신을 개발했다. 1942년 소크는 대학 연구소에서 인플루엔자 백신을 연구하면서 시설의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동의 없이 실험 단계 백신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다. 현대의 윤리 규범에 어긋나고 당시에도 문제가 됐다.
1947년 소크는 소아마비 백신 연구를 시작했고, 6년 후인 1953년 백신을 개발했다. 아시시의 성당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후일 그의 연구소 건축에 반영되었다. 1954년 미국의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 180만 명을 피험자로 자원시켰다. 32만 5천 명의 역대 최대 자원봉사자가 이 실험을 도왔다.
하지만 백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틴에이저들의 접종률은 1퍼센트 미만이었다. 1956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 백신 주사를 맞았다. 이 장면이 TV로 방영된 후 백신 접종률은 수직 상승했다. 6개월이 지나자 접종률은 80퍼센트에 육박했다. 1954년 4만 명이던 소아마비 환자는 1957년 5500명으로 줄었다. 사망자도 크게 감소했다.
CBS 기자가 소크에게 백신의 특허를 취득할 것인지 물었다.
기자가 특허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자 소크가 대답했다.
"글쎄요, 민중이라고 해두죠. 특허는 없어요. 태양을 특허로 청구할 수 있나요?"
그는 제조법을 공짜로 내주었다.
많은 미국인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정부가 소크에게 거금을 주라고 제안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막대한 수입을 올리기를 바랐던 역사상 드문 사례다. 소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성을 얻었다. 1955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크의 백신을 소련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때는 냉전 시대였다. 전쟁 영웅인 공화당원 대통령이 국민에게 무상의료를 하도록 필사적으로 촉구했다. 아이젠하워는 지역 사회에 예방접종을 장려하므로 국민의 집단 면역을 강화시켰다.
소아마비는 전 세계에서 사실상 박멸되었다. 1961년에는 보다 간편한 경구용 생백신이 앨버트 세이빈에 의해 개발되었다. 1962년 캘리포니아주에 소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건물은 벽이 없고, 높이가 성당처럼 높았다. 소크는 1993년 죽기 전까지 에이즈 백신을 연구했다.
잘못된 대처, 에이즈(AIDS)
에이즈를 둘러싼 낙인은 매독에 필적했다. 가족조차 환자를 버렸다. 게이 역병이라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62년 아칸소주 상원의원은 역병 보균자를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이즈 환자 전원을 섬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격리는 항상 부와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자들에게 이루어졌다. 몰로카이섬의 나환자들, 장티푸스 메리의 경우처럼.
쉽게 잊는 인간의 태도는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서로 힘을 합치고 하나가 되어 소아마비를 퇴치한 영웅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희망이 샘솟는다. 루스 코커 버크스(1959~)처럼 수 천 명의 에이즈 환자를 돌본 사람도 있었다.
에이즈 환자가 살아남게 된 것은 매독 환자를 위한 '코 없는 사람들의 모임'처럼, 크럼턴 씨가 결성한 '게이 남성의 건강 위기(1981년)'같은 단체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도우고, 항의하고 소리를 높여서 에이즈에 무심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1985년 10월 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했다. 록 허드슨의 죽음은 사람들을 패닉 상태로 몰고 갔다. 에이즈 (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85년 11월 처음으로 에이즈를 다룬 영화 '언 얼리 프로스트 An Early Frost'가 NBC에서 방영되었다. 월요일 밤 풋볼 경기를 제치고 3천 4백 만명이 이 영화를 시청했다. 이 영화는 전염병을 대중 문화로 알린 첫 시도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에 관한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유능한 지도자는 질병이 유행할 때 대중이 대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창궐했을 때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소아마비가 번질 때 루스벨트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러했다. 위대한 소통가라는 평을 듣는 레이건은 에이즈를 비웃기보다 좀 더 동정적이고 자비롭게 반응해야 했다.
1987년이 되어서야 레이건은 에이즈에 관해 공개 연설을 했는데, 이미 2만 8천 명의 미국인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은 후였다.
록 허드슨이 사망한 후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에이즈 기금 활동을 펼쳤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억 5천만 달러의 주얼리를 에이즈 연구에 기부했다. 이는 1986년 미국 정부 예산만큼의 금액이었다.
#세계사를바꾼전염병13가지, 제니퍼 라이트, 이규원 옮김,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