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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01. 2020

보라색 바지

삶을 윤기 있게 하는 작은 도전


남편의 퇴직이 다가오자 은근히 입성에 신경이 쓰였다.

이 무렵의 남자들은 이상하게 어깨가 처지고, 눈에 빛이 사라지고, 등이 굽어 보인다. 옷이라도 좀 새뜻하게 입어야 할 것 같다.


남편은 옷차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아니,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게 옷의 기능이라 생각하는 요즘 보기 드문, 아내로서는 그리 나쁠 게 없는 취향을 가진 남자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가끔은 심하다 싶을 때가 있다.


그는 골프 치는 것을 좋아한다. 집 근처에 싼 가격으로 공을 칠 수 있는 체육공원이 있다. 그곳에는 멋지고 세련되고 울긋불긋한 골프웨어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옷에 별 관심이 없다. 어쩌다 마음먹고 사다주면 비싼 옷 사 왔다고 표정이 시큰둥하다.


“운동할 때는 낡은 옷이 편하지.”  

운동하러 간다며 입고 나온 티셔츠는 목둘레가 늘어나 후줄근하고, 바지는 펑퍼짐하고 빛깔이 바랬다. 지난번에 사준 옷은 어쩌고? 물으면, 이 옷도 아직 입을 만한데 왜 그러냐고 되묻는다. 난, 싸울 것 없이 저 옷을 이다음에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지난번에도 살짝 지하 의류함에 내놓고 혼자 웃었다. 없는 걸 찾지는 않을 테지. 그러던 남편이 요즘 변했다.




작년 여름은 너무 더웠다. 나갔다 오면 반드시 옷을 빨아야 했다. 이참에 시원한 바지를 몇 벌 사서 여름내 신경 쓰지 않고 지내야지, 마트에서 바지를 고르는데 주인 여자가 보라색 바지를 권했다.


 “아니요.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나는 손을 저었다.


 “안 그래요. 남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우리 남편도 이 바지만 입어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남편이 저런 색 바지를 입을 리 없어. 회색, 감색이 제격이야. 바지 두 벌을 사서 나오는데, 입구에 걸린 보라색 바지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 앞에서 턱을 괸 채 왔다 갔다 했다. 요즘 들어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게 많아졌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가끔 일탈해보는 것도 괜찮아. 남의 시선이 두려울 나이도 아니지. 싫어하면 환불하면 돼. 그러고는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바로 후회했다.


괜히 섣부른 짓을 했어. 환불하려면 성가신데 아예 지금 되돌아가서 무를까?




얼마 전 제주 시댁에 갔더니, 부모님 표정이 전보다 어두워 보였다. 두 분은 올해 아흔셋, 동갑이시다. 두 분은 늘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편인데, 어머님 귀가 많이 나빠져 안 들리게 되고부터 대화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모시고 나가서 맛있는 것, 집에서 드시지 않는 음식을 사드리고 싶었다.


“아이고, 됐다. 나는 집에서 먹을겨.”

마다하는 어머님을 남겨 두고 아버님과 우리는 세화 바닷가로 갔다.


그곳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하루가 다르게 새 건물이 들어선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피자집을 찾아갔더니 레스토랑이 아니라 차만 파는 카페였다. 두 가게가 나란히 있어서 헷갈렸다. 주인이 옆 가게를 손으로 가리켰다. 돌아서 나오는데, 차를 마시고 있던 젊은 여자가 아버님을 보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는 게 아닌가.카페와 아버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을까?


황당해진 나는 갑작스레 아버님 옷차림에 신경이 쓰였다.

 “그냥 입고 갑소.”

어머님 한 마디에 외출 준비를 하던 아버님은 멈칫하다가 집에서 입고 있던 고무줄 운동복 바지에 파란 고무신 차림으로 우리를 따라 나오셨다.





교직에 계시다 은퇴하신 아버님은 평소 제법 멋쟁이다. 키가 크고 등이 꼿꼿해 양복을 입고 모자를 쓰면  년은 젊어 보인다. 늘 외출할 때 꼼꼼이 옷을 챙겨입으신다. 하지만 아버님은 어머님 말을  듣는다. 평소와 달리 집에서 입던 옷차림으로 나오게 된 이유다.


레스토랑에서 아버님은 파스타를 맛있게 드셨다. 젓가락으로 드셨지만, 뭐 대순가. 꿀을 곁들여 먹는 고르곤졸라 피자를 좋아하셨다.

집에서 기다리던 어머님은 포장해온 마르게리타 피자를 보고 뭐 하러 사 왔냐, 나무라지 않았다. 한 조각 잡숫더니, 나중에 보니 부엌에서 드시고 계셨다. 우리가 이따끔 색다른 음식을 먹고싶듯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일탈이었지만 두 분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돌았다.


바지 세 벌을 꺼내 놓으니, 남편은 보라색 바지를 제일 먼저 집었다.


  “빛깔이 좀 튀지 않아요?”

  “글쎄… 그런가?”  


  남편은 입어 보더니,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 옷차림이 달라졌네요?”

  다음날 직장 동료들이 관심을 보였 한다.


  보라색 바지가 남편에게 작은 활기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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