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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22. 2020

누구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

정용준의 「선릉 산책」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말을 더듬거나 이따금 갑자기 잠이 드는 건 그들에게 장애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일 뿐. 「떠떠떠, 떠」


바다에서 조업하던 어부가 사람을 건진다.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사진이 나온다. 신원 미상 아랍계 노동자. 어부는 화장 후 재를 조금 가져와 바다에 뿌려 준다. 먼지 같은 남자의 유골이 바다를 건너 고향을 향해 날아간다. 어부는 사진 속의 소녀를 생각한다. 「가나」


정용준의「선릉 산책」을 읽었을 때 나는 이전의 그의 단편「떠떠떠, 떠」와 「가나」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은 일면 어두워 보이지만, 밝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드리워진 커튼을 걷으면 투명한 길이 보인다.




주인 공 ‘나’는 우진 형의 부탁으로 아홉 시간 알바를 하게 된다. 헤드기어를 쓴 스무 살 청년 한도운을 돌보는 일이다.


“다치지 않도록만 해 주세요.”

부탁하고 여자는 사라진다.


나는 우진 형의 조언대로 사람이 없는 곳을 찾다가 선릉에 가게 된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한두운은 침을 뱉은 버릇이 있고, 식탐이 있다. 통제가 쉽지 않다. 식당에서 난장판을 한 번 겪고 나니 마음의 온기도 여유도 반절은 빠져나가 버린다. 혼령이 걷는 돌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인격을 앞의 인격과 연결하기 어렵다. 그에게도 ‘자아’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


도운이 메고 다니는 가방엔 쓸데없는 짐이 한가득이다. 여자가 도운을 학대하는지 모른다. 내 물음에 우진 형은 “우리는 그녀의 마음을 절대로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한도운은 믿을 수 없게도 나무의 이름을 모두 안다. 오리나무,  화살나무, 자귀나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시계방향으로 걷는 우리와 마주친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도운은 긴장한다. 권투 선수처럼 재빨리 움직이는 도운을 보고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린다.


“파피용”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나는 어느 직장에서나 적응을 못했다. 나비(파피용)처럼 매번 접고 말았다. 한두운이 남과 소통하기 어렵듯 나도 그랬다.


나는 한두운과 나란히 걸으며 지난 이야기를 한다.


한두운은 나를 빤히 봤다. 기분 탓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의 얼굴에서 어떤 반응이 비쳤다. 여차하면 놓칠 뻔한 작은 미소가 고요히 떠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이 생각은 스스로 생각해도 상당한 비약이지만 나는 그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다음에 웃은 것이라는 근거 없는 판단을 했다. 응답하는 눈빛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일이 생겼어요. 세 시간만 더 봐주세요."

여자의 문자에 나는 화가 났다.

뭐야. 이게. 설명도 없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고 짜증이 났다.


한두운이 다시 나무 이름을 말하자 나는 불쑥 화를 낸다. 밑바닥에 분노가 깔려 있다. 나도 우진 형과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게 어두운 감정을 내비친 나에 대한 희미한 수치심이 마음속에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헤드기어를 벗은 한두운이 자기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자해한다. 헤드기어는 내 생각과 달리 자해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한두운의 다친 얼굴을 본 여자가 성난 음성으로 묻는다. 이런 내 입장을 생각해 본 적 있냐고.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파피용.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조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발음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나는 주먹으로 내 오른쪽 광대뼈를 툭, 때려봤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날 정도로 정말 아팠다.





정용준 소설의 주인공들은 버려진 매듭, 부서진 이어폰, 부러진 안경다리, 흙속에 반쯤 파묻힌 자주색 털모자 같은 사람들이다. 시계방향과 반대로 걷는 사람들. 어떻게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상대를 이해할 때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들을 다정하게 바라보기를.

편견과 오해를 허물기를.


그는 뒷걸음을 치며 내 뒤로 숨었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어깨와 팔에 흡수되듯 고스란히 전해졌다. … 한두운은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한참 동안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더니 대뜸 내 손을 잡았다.


2009년「굿나잇, 오블로」로 ‘현대문학’에서 등단한 정용준 작가는 「선릉 산책」으로 황순원문학상과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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