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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20. 2020

울적할 땐, 연애소설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


40대의 마지막 해에 나는 많이 울적했다.


아이들이 떠난 집은 휑한데, 습관적으로 오후만 되면 어디에 있던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얼른 들어가야지. 그러다 문득문득 깨달았다.


아, 이렇게 서둘러 집에 갈 필요 없지.

이젠 저녁 먹을 사람도 없는데.


당시 남편은 회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밤늦게 퇴근했다. 다섯 시 무렵이면 부엌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집을 나른한 오렌지색으로 감쌌다. 무료하게 베란다 바깥을 내다보곤 했는데, 강변도로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의 후미등이 붉게 깜빡이며 줄지어 서 있었다.


갑자기 넘쳐난 시간을 주체 못 해서 이것저것 취미생활을 했는데, 그중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공방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흔 초반의 개성 강하고 유쾌한 엄마들을 만났다. 요즘 말하는 덕후나 팬덤의 선두 주자라 해야 할까.


마음이 돌같이 딱딱했다.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고, 가슴이 따뜻하고 말랑말랑 해지는 사랑의 감정을 느껴본 게 아득했다. 그 무렵에는.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울적해하니까, 한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그럴 때는 달달한 연애소설을 읽어야 해요.

연애소설?

언니, 한 질 빌려드릴까요? 저희 집에 있어요.

한 질?

더 빌려드릴 수도 있어요.


그녀가 다음날 열 권짜리 소설을 들고 왔다. 나는 집 소파에 드러누워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소설을 읽었다. 그야말로 달콤했다. 배도 안 고팠다. 사랑에 빠지고 애틋하게 이별하고 다시 만나는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였는데,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읽는 동안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몸속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이 다시 녹아 흐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소개로  ‘정글북’이라는 만화방 겸 도서대여점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처음 빌려 읽은 책이 ‘성균관 스캔들’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 전이라고 나는 빠트리지 않고 말한다. 마치 내가 방송국에 소개한 것처럼.


해가 어둑하게 질 때 베란다 바깥을 바라보고 서 있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두운 터널을 나는 달달한 소설을 읽으며 빠져나왔다. 인간의 감정이란 게 상상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풍선처럼 띄워 올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책 속에는 어떤 도덕관념도, 제약도, 한계도  없었다.


 비 오는 날에는 기분이 괜찮으면 창가를 내다보며 음악을 듣고 분위기를 즐기지만 우울하면 끝없이 가라앉는다. 이런 날 나는 연애소설을 친구들에게 권한다. 최근에는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우아한 연인』을 말해줬다.


읽어봐, 재미있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복잡하고 난해하지도 않아. 줄거리가 그물처럼 짜여 있어. 읽고 나서 다시 첫 장면을 읽어도 좋아.


등장인물의 행동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지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나이 든 여인, 그가 후원하는 젊은 남자, 가장 아름다운 것을 처참하게 부수는 작가의 손길에 나는 책을 내려놓고 숨을 헉 몰아쉬었다.


자존감 강한 여성 케이티가 나는 좋다. 승진을 앞두고 과감하게 직장을 옮길 줄 아는 용기가 부럽다. 팅크가 사라졌을 때 은연중 가벼워진 마음 한 조각을 고백하는 솔직함이 마음에 든다. 게다가 책을 좋아한다니. 읽는 중에도 빌리 홀리데이의 '뉴욕의 가을' 선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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