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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25. 2020

벗 해주는 거지, 뭐

사랑은 함께 있는 것


자전거 두 대가 스치듯 지나갔다.

앞 자전거는 여자가 몰았는데 뒷좌석에 의자를 매달아 네댓 살 정도 아이를 태우고 있었다. 자전거는 제법 속도감 있게 달렸고, 그 뒤를 초등학교 일 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바싹 쫓아갔다. 두 자전거가 너무 가까이 붙어서 달리기에 나는 불안해서 계속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그때 또 다른 자전거 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넉넉한 몸집의 아빠가 그들 뒤를 받쳐주듯 달려오고 있었다.




-퇴직하면 한 달의 반은 제주 가서 살려고.

남편이 말했을 때 나는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인가 다.


퇴직하면.

퇴직하면.

퇴직하면.


그간 남편은 퇴직이 무슨 로또 당첨이라도 되는 양 하고 싶은 일들을 늘어놓았다.


제주에 집도 여러 차례 지었다. 상가는 짓다가 너무 멀어서 세 받기 너무 힘들겠다 싶어 접었다. 외진 바닷가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꿈을 꿀 때는 내가 극구 말렸다. 너무 꼬질꼬질해질 것 같아서. 그러더니 이젠 아예 시댁에 들어가 살겠다는 거다. 연세 많은 부모님 때문일까?


-지난번에 어머님이 30 만원만 주면 동네 아주머니가 와서 밥도 빨래도 해 준댔어.

-그건 그거고.

-퇴직하면 일 안 할 거야? 제주 가게.


얼떨결에 속 마음이 튀어나왔다.


-뭐? 너, 내가 다시 일하기 바라는구나.


지난번 비 오는 날 둘이서 분위기 좋게 술 한 잔 나눠 마실 때 남편은 정색을 하고 자기는 퇴직하면 절대 일을 안 할 거라고 말했다.

-40년간 남의 눈치 보고 다녀서 이젠 일 안 하고 싶어.

나는 이해하는 표정으로 그러라고 했다. 그날 갓 구워 나온 빈대떡도 맛있고, 술맛도 좋았기에.


-일 안 한다고?

-당신 친구들은 다시 일하던데?

-남자는 일 안 하면 순식간에 무너져.


'육 개월만 집에서 놀아봐, 생각이 달라질 걸.' 그런 분위기에서 이렇게 말할 순 없지 않은가. 난, 그 정도로 잔인한 여자는 아니다. 말하려다 꾹 참았다.


그때 일을 남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입으로 두 말한다고 나를 나무라는 거다. 사람은 솔직해야 한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잠시 후 남편이 중얼거렸다.

-벗해 주는 거지 뭐.


-그래? 그럼 나는 자유 부인되는 거네.

-그러던지.


잠시 후 남편이 조금 후퇴했다.

-삼사일 가서 사는 거지.


-가거나 말거나.

-너도 같이 가면 좋지.

이제야 남편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시집살이하라는 말?

대화가 주제에서 벗어났다.


-언제 시집살이는 해보고 그러냐?

-시집살이는 왜 꼭 해야 하는데?

이야기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분위기 대충 짐작하시리라.


나는 은근히 심통이 났는데, 솔직히  마음이 나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전의 나는 남편이 출장 가면 밤에 잠이 안 온다는 친구들을 은근히 비웃었다. 남편이 집을 비울 때마다 룰루랄라 은근히 해방감을 맛봤기에 이렇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문득 나는 엔드루 포터의 소설 속 인물 '라자'가 떠올랐다.




엔드루 포터의 장편 소설 『어떤 날들』에서 라자는 친구에게 상해를 입힌 혐의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다. 라자와 그의 애인 클로이는 국외 탈출을 결심한다. 휴게소에서 라자는 클로이를 따돌리고 혼자 떠난다.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길을 클로이까지 함께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를 버리고 간 순간부터 국경에 다가가기까지의 순간 어느쯤에선가 라자는 마음을 바꾸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후일 라자는 자기의 신념이 무너진 순간이라 말했고 클로이는 그 순간을 사랑의 증거, 그가 그녀 없이 살 수 없는 표시라고 했다.


거의 이십 분 동안 화물칸 벽을 두드렸어, 라자는 나중에 말했다. 하도 심하게 두드려서 손가락 관절이 피투성이로 멍이 들었지. 너무 두드려서 옆에서 함께 타고 가던 여자가 울기 시작했어. 태오가 마침내 차를 세웠을 때 그 사람한테 빌었어. 평생 그 무엇을 위해서도 그렇게 빌어본 적이 없어. 차를 돌려서 돌아가자고 빌고 또 빌었어.
나중에 라자는 클로이가 그 얘기를 다시 해달라고 하면 화를 내곤 했다. 나한텐 정말 창피한 순간이었단 말이야. 그는 말했다. 테오 앞에서 울었던 일이나, 마냥 서서 빌었던 일 모두.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여태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건 라자의 말처럼 일종의 ‘신념’이었는지 모른다. 이러이러한 게 사랑이라는 믿음. , 여태 믿음을 사랑인 줄 알았던 건 아닐까?  사랑에는 어떤 틀이 있었다. 라자와 클로이처럼 사랑은 함께 있는 것, 남편의 말처럼 옆에서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벗해주는 게 사랑인지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아서 남편에게 시무룩하게 자라 말하고는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어떤 날들』앤드루 포터, 인은영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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