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May 07. 2020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집 앞 매화나무가 점점이 하얀 꽃을 흩뿌리던 이맘때, 나는 매주 한 번 서울행 기차를 탔다. 지난 일 년 간 매달렸던 일을 마친 터라 휴식이 필요했다. 신문에서 글쓰기 강좌 안내를 봤을 때, 나는 따뜻한 햇볕을 쬐고 신선한 바람을 마시며 여행하는 기분으로 서울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면 덕수궁 돌담이 있다. 담을 끼고 걷다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왼쪽엔 주황색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 성당이, 오른쪽엔 하얀색 근대식 건물인 서울시 의회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때쯤이면 넘어가는 햇살로 주위가 나른하다.

한 주가 지났을  나는 지름길인 성당의 쪽문을 발견했다.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인 카페를 지나 성당 뒤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한옥이 보인다. 사제관이라 했던가. 이태리 어느 도시의 건물 같은 성당과 회색 기와 얹힌 한옥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낯선 것을 부드럽게 보듬어 안는 저녁 햇살 덕분인지 모른다.


계속 골목을 올라가면 오른쪽에 ‘차이나 레스토랑’이라 적힌 3층 높이의 회색 건물이 있다. 도로변에 놓인 녹색 칠판이 하얀 글자로 ‘오늘의 메뉴’를 알린다. 배고픈 시간이어서인지 식당의 메뉴는 늘 나의 상상을 부풀렸다. 하지만 석 달을 지나다닐 동안 나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혼자 식사하기엔 낯선 공간이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그 전 해 나는 어느 단체옛 역사를 찾아 파일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자료를 모으다 보니 옛적에 인화한 사진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최근 십 년간 파일로 저장한 사진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뀐 탓이었다. 아날로그는 남았는데 디지털은 사라진 희귀한 경우였다. 이왕 하는 일, 나는 한 두 권이라도 책을 만들어 자료를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길을 걷다 예기치 않게 방향을 틀 때는 조율과 설득이 필요한데 마감 시한에 맞추려는 급한 마음에 열정만 앞섰다. 마치고 나니 부대낌이 있었다.

책이 나왔을 때는 호흡을 고르며 겉장만 들여다봤다.  펼치는 것이 두려웠다. 완성된 책은 좋으면서 미숙했고 뿌듯하면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나, 하지만'으로 버무려진 문장들. 진작 글쓰기를 배웠더라면 좀 더 읽기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부끄러웠다. 그러던 차에 글쓰기 강좌 안내를 다. 대전에서 서울은 다닐만한 거리였다.


공부의 첫발을 내디디며 나이를 의식하진 않았다. 쉰 중반의 나이였지만 건강했고, 또래 친구들과 오랜 기간 모여 살아서 한창나이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찾아온 의욕이 반가웠고, 새롭게 들어설 세계가 궁금했다. 강좌 몇 번 듣는다고 글이 엄청 늘겠냐마는, 내게는 의미 있는 첫 시도였다.




신문사 건물에 도착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치 해가 넘어간 시각이었다. 사옥 일 층의 야외 카페는 이런저런 용무로 신문사를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댔다. 노을빛 조명이 멀리서 온 방문객을 다정하게 맞았다. 키가 조금 큰 남자가 일어서면 닿을 만치 늘어진 백열등이 어둠을 밀어내며 사람들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다. 말소리가 부드럽게 웅웅댔다. 그 모습이 마치 그림 속 정원 같았다.


오래전, 영국에서 그 그림을 봤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각, 아이들이 등을 들고 정원에 서 있다. 은은한 불빛. 꽃은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이 꿈처럼 모호하다. 분홍, 보라, 다홍⋯.

처음으로 혼자 찾아간 미술관이어서 나는 오랜 시간 그림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사옥에 들어갈 때 내가 떠올린 건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Carnation Lily Lily Rose)’,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그림이었다.

화가는 해 넘어가는 저녁, 불 켜기 시작한 정원을 화폭에 담았다. 십 분 정도의 짧은 시간을 위해 화가의 딸과 친구는 몇 개월을 같은 시각 정원에 등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는데.


서울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기차를 타고 올라가니 이참에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해보면 어떨까? 서울에 어져 있는 미술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일정을 미리 정하고 오전에 출발해 하루에 한 곳씩 미술관을 찾아갔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대림미술관, 아트선재센터 같은 곳.


길눈이 어둡지만 미리 조사하고 가니 괜찮았다. 배고프면 미술관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고, 지치면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저녁에 글쓰기 강의를 들으러 갔다. 돌아올 때면 체력이 달려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언제 그렇게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한 적이 있던가 싶어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자유로운 만큼 나는 풍요로웠다.


 



석 달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쓴 글은 정작 몇 편 되지 않았다.

강의실에 모인 수그레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수줍게 내밀던 글도. 어릴 적 키우다 팔아버린 강아지, 돌아가신 어머니. 대부분 가슴속에서 오래 묵었다 나온 글들이었다. 대전에서 올라왔다니 무척 놀란 얼굴이었지.

수업을 마칠 때면 기차 시간이 촉박해 그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고 덕수궁 돌담길을 지날 때는 급히 달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지금도 매주 찾아가던 미술관과 성당 옆 골목, 카페의 노란 불빛을 기억한다.  해지는 저녁, 오르막을 걸어갈 때면 나는 한 번도 예측하지 못한 인생의 새 길을 걷는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둠으로 둘러싸인 불빛 가득한 카페에 들어설 때 나는 어두워지는 정원에 불 밝히는 등을 든 소녀가 된 것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