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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23. 2020

『내가 사랑한 공간들』

윤광준 지음, 을유 문화사



 ‘삶의 안목을 높여주는 공간 큐레이션 20’이란 부제목이 붙은 이 책은 기자이며 사진가인 윤광준이 전국 곳곳을 다니며 아름다움의 실체와 조우한 공간을 소개하는 글이다.


손가락 한번 움직이면 바로 다음 날 현관 바깥에 얌전하게 책이 도착해 있는 요즈음에도 나는 이따금 도서관을 찾는다. 오래된 서가 한 귀퉁이에서 아무도 펼친 적 없는 칼칼한 새 책을 발견하고, 평소 나의 취향과 동떨어진 책을 우연히 집어 드는 순간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책을 읽기로 한 건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있었던 시간이 낯선 공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제일 먼저 펼친 부분은 책 중반에 실린 베어트리파크였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다. 오래전에는 매주 한 번씩 스쳐 지나갔고, 작년 봄에는 가려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접고 말았던 곳이다. 가깝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어서 늘 막역한 환상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곳에는 곰이 있다는데,  피는 계절엔 더욱 아름답다는데. 


베어트리파크를 작가는 ‘한 사람이 50년간 가꾼 종합 선물세트 같은 수목원’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처음에 이곳을 혼돈스럽게 느꼈다. 국내의 수많은 수목원과 뭔가가 달랐다. 그 이유를 작가는 정원을 수차례 오가며 깨닫게 된다.

정원을 가꾸려는 집념을 가진 한 인간은 연결되는 원경이 없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완벽하게 바깥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정원은 안쪽만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잘 다듬은 향나무가 켜켜이 자란 동산이 마치 그림 다.




녹사평역, 앤트러사이트, 씨마크 호텔, 스타필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풍월당, 동춘17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롯데 콘서트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뮤지엄 산, 부천아트벙커 B39, 죽설헌,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보안1942, 피크닉, F1963, 오드 메종.



씨마크 호텔



사진을 보고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직접 가본 듯 상상에 빠졌다. 강릉 씨마크 호텔 빛깔없는 유리창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언젠가 강릉을 지나다가 해변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그리 낯설지 않은 건물을 보면 이 글을 쓴 순간이 문득 떠오를지 모른다.


작가가 소개한 몇몇 공간은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 저장된 곳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큰 창으로 바깥의 설치미술을 바라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누구와 함께 그 공간에 있는지는 무척 중요하다. 작년 봄 나는 그곳에 아들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저게 뭘까, 뭘 의미하는 것일까. 최정화의 '민들레'는 버려진 폐기물, 냄비, 솥, 소쿠리로 만든 작품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몹시 화난 지구 모습 같군' 생각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조각물이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공간에 대한 기억은 시곗바늘을 뒤로 돌린다.



최정화 '민들레'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은 강원도 원주에 있다. 안도 다다오는 그의 특징인 노출 콘크리트 대신 한국의 옛 담장을 되살려 놓았다. 인근의 돌을 캐내 벽에 붙였다. 담장 아래 물이 고요하다. 물을 끌어들이는 건축 기법. 물에 비친 ‘뮤지엄 산’은 비밀을 가진 성채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오래전 어느 가톨릭 성지에서 나는 이렇게 주위가 물로 감싸인 건물을 본 적이 있었다. 물은 건물도 비추고 하늘도 비췄다. 흐르지 않는 물의 정적이 그대로 건물에 전해져 교회는 경건하고 신비로웠다.



뮤지엄 산



공장, 정미소, 창고를 이용한 공간 활용이 한동안 유행했다. ‘부천아트벙커 B39’는 특이하게 쓰레기 소각장을 활용한 건물이다. 쓰레기를 담아두던 지하 벙커는 아파트 한 동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지하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 39미터가 건물의 이름이 됐다. 오랜 시간 농축된 냄새가 인간 욕망의 잔재로 느껴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혐오 시설의 냄새조차 세월의 흔적으로 소중하고, 낡고 더러운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 남겨진 공간은 시대의 일기장이 되었다.


부천아트벙커 B39



우리는 의식적으로 과거의 추함을 부정하고 지우려 한다. 오로지 아름다움만 남기고 기억하려 한다.


살아온 시간을 담은 흔적은 원래대로 남겨져야 실감 나는 법이다. 흩트려지고 덧칠될수록 변형의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 현재가 과거의 흔적에 끼어들어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F1963


건물을 개조한 복합 문화공간으로 작가는 부산 수영구에 있는 'F1963'을 소개한다. F1963은 전 세계 자동차 네 대중 하나는 이 회사의 와이어, 스프링, 강선을 쓴다는 고려제강의 옛 공장이다. 한 분야만을 고집스레 이어온 기업의 성공은 이 공장에서 비롯됐다. 1963년은 공장이 완공된 해로 고려제강이 잊지 못하는 해이다. 역사와 의미를 알면 공간은 달리 보인다.


논밭만 있던 곳에 세워진 공장은 이후 주변에 빼곡하게 주민들이 들어서며 민원의 대상이 된다. 결국 공장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이곳을 헐고 호텔이나 상가를 짓거나 택지로 매각해서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장의 흔적을 남겨놓고 싶었다.


2016년 부산 비엔날레 총감독이 우연히 이곳을 찾아와 미술 전시 공간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찾아온 아티스트들은 세월의 더께를 지우지 못한 옛 건물의 분위기와 내부 공간에 매료되었다. 비엔날레는 성공적으로 마쳤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느낀 압도감을 화제로 삼았다. 소문이 전국적으로 번져 고려제강은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손을 잘못 대면 돌이키기 어려운 과거의 흔적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원형의 보존과 현재의 용도를 모두 충족시킬 방안을 찾아야 했다. '기존 건물에서 남길 수 있는 것은 빠짐없이 남겨달라.' (…) 건축주의 의지는 애원처럼 간절했다. 원형이 사라지면 기억도 지워지는 탓이다.



복합 문화 공간 F1963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곳에는 갤러리, 카페, 전시장, 서점, 레스토랑, 맥주홀이 들어서 있다. 이제는 커피의 맛보다는 어디서 마시느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정서적인 반응이 달라진다.


F1963의 가장 큰 매력은 도서관이라 한다. 책이 주는 상징과 종이의 물성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오라를 풍긴다.



F1963 도서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을 가지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이들 모두가 꿈꾸는 미래일 것이다. 멋진 공간을 잘 보존해서 주민들에게 선물했다는 면에서 고려제강은 훨씬 부유한 다른 기업들과 달리 자기 일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가진 기업이라 할 수 있겠다.


화가 박태후가 만든 정원 '죽설헌'이 인상적이었던 건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모네의 정원에 들른 적이 있다. 모네의 정원에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고, 연못에는 수련이 그림처럼 피어 있었다. 정원의 꽃나무들은 비록 처음은 사람의 손에 심긴 것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며 경계 없이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웠다. 박태후도 모네의 정원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다.



모네의 정원


그는 지베르니를 다녀온 후 죽설헌을 화가의 정원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정원은 모네의 정원과 달라 보인다.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대숲 사이 길은 인공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선택과 배치는 자연이 맡았다 한다. 드러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게 고수의 솜씨라는데,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듯도 모를 듯도 하다.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막상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은 우리 집 베란다에 놓인 작은 테이블 앞이다. 가로 세로 너비가 일 미터 남짓한 이 테이블은 우리 가족의 첫 식탁이었다.


삼십 년 넘게 식탁은 나를 따라다녔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테이블을 나는 항상 곁에 둔다. 햇빛이 뜨거운 날에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지게, 비 오는 날에는 바싹 붙여 놓는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치면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 작가들이 만든 미지의 공간이 나를 향해 문을 연다.



#『내가 사랑한 공간들』윤광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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