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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24. 2020

음악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평행과 역설』에드워드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대담집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그는 열한 살 때 이스라엘 건국을 계기로 이스라엘에 이주했고, 이후에는 런던, 파리, 예루살렘, 베를린에서 살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아랍인이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 예루살렘은 영국령이어서 아랍인이지만, 그의 이름은 영국식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군으로 참가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사이드는 이스라엘 건국으로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카이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두 사람은 1990년대 초 런던의 한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책은 이후 5년간 그들이 나눈 대화이다.


19세기 초 괴테는 스페인 부대에서 활약하던 독일군이 귀환하면서 갖다 준 코란 한 장에 총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페르시아 시인 하피스의 시에 눈을 떴고, ‘다른 존재’에 대해 쓴 특별한 시집을 내놓았다. 이것이 ‘서동시집’이다. 유럽 문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괴테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인 1999년 에드워드 사이드와 다니엘 바렌보임은 독일 바이마르, 나치 수용소가 있었던 부헨발트 인근에서 열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의 아랍, 이스라엘, 독일 출신 음악가들을 모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결성했다.


-저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환상적인 시를 쓴 괴테의 정신 아래 바이마르에 모인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사이드)


이스라엘 학생들은 다마스쿠스와 암만, 카이로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는 이들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시리아 소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에게 이스라엘인들은 조국에 좋지 못한 상황을 만드는 원흉에 불과했다.


-너는 아랍 음악을 연주할 자격이 없어. 아랍 음악은 직 아랍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너는 무슨 권리로 베토벤을 연주하지? 독일인도 아니면서 말이야.

-전, 이 자리가 무척 불편합니다. 집에 돌아가면 레바논으로 파견되어 여기 있는 누구에게 총을 겨눌지 모르니까요.


모래알처럼 따로 노는 아이들을 다니엘 바렌보임은 하나의 악단으로 묶어 갔다.

서로 달가워하지 않는 건 이스라엘과 아랍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스라엘 학생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아랍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열흘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극복하고 학생들이 오케스트라로 거듭 탄생하는 과정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는 어떠한 정치적 함의도 없었다. 일련의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 어느 순간 한 지휘자 아래 하나의 오케스트라 안에서 하나의 작품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버렸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장소나 변치 않는 물건이라기보다 일종의 흐름, 흘러가는 물줄기 같은 것입니다. (사이드)


하나의 음표를 함께 연주하면서 그들은 이미 서로를 더 이상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남이 중요한 이유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 오보에 주자가 A장조를 연주하는 부분에서 이스라엘 단원들이 놀라는 표정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집트인 오보에 주자 쪽으로 돌아앉아 그가 완벽하게 연주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죠. (사이드)





-굳이 초밥을 먹으러 일본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어졌죠. 그렇지만 정치적, 민족적 갈등은 더 골이 깊어지고 옹졸해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바렌보임)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세계적인 획일화 현상에 대한 거부 반응입니다.

글로벌한 분위기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익숙한 상징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전통 의상을 입는다든지… 정체성을 주장하는 한 가지 방법이죠.

두 번째는 제국이 남긴 유산 때문입니다. 영국인들은 떠나면서 많은 나라를 분열시켜 놓았죠. 인도, 팔레스타인, 아일랜드. 다양한 민족성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칸막이를 해둔 것입니다. 일단 한 번 쪼개진 것을 다시 뭉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이 두 가지 요소가 고질적이고 위험한 외국인 혐오 사상과 정체성의 갈등을 낳았습니다. (사이드)


-나치는 베토벤의 음악을 이용했죠. 하지만 베토벤 같은 작곡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 그 작품은 작곡가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별개의 존재로 독립합니다. 세상의 일부가 되는 거죠. (바렌보임)


-과거의 작품들에 관해 강의할 때 나는 그것을 가능한 한 그들이 창작된 시대의 작품으로 설명하거나 묘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제인 오스틴을 읽으면서 프루스트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제인 오스틴이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프루스트가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할 수 없었던 것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사이드)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시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영원을 향하고 있죠. (바렌보임)




모든 위대한 작곡가는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무턱대고 위대한 정복자라고 칭찬했고, 드뷔시는 프랑스 극우주의자였다. 하이든은 귀족 후원자의 비굴한 고용인이었으며, 바흐는 대주교나 군주의 식탁에서 종종 그들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사례를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작곡한 음악을 들을 뿐 그들의 허물을 떠올리지 않는다. 음악은 예술 작품으로 언어와 같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다.


-음악의 가장 특별한 점은 되풀이할 수 없다는 데 있지요.

-그게 앞서 제가 말한 그 가치입니다. 매우 희귀한 어떤 것 말입니다.

-소리는 수명이 짧지요. 곧 지나가 버리니까요. 소리가 그처럼 다양한 표현을 가지는 이유는 당신이 원한다고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침묵을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음악이 가진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완전히 상반된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이죠. 모든 것을 잊고 싶을 때, 각박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음악은 완벽한 도피 수단이 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음악 공부는 인간 본성에 대해 배우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음악을 잘 연주하기 위해 이성(머리), 감성(가슴), 세속적인 것(배) 사이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인간이 되는 길을 보여주는 데 음악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지난 광복절 나는 혼돈스러웠고 우울했다. 우리 또래는 일제의 침략과  8.15 해방, 6.25 전쟁을 겪지 않았다. 풍족하지 않아도 궁핍함을 맛보지 않았으니 운 좋은 세대라 할 만하다.

나는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누가 여행을 가자하면 일본이 떠오르고, 헬로 키티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영화 '심야식당'이 친숙하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이 친일파이니. 아예 애국가를 바꾸자 한다. 그가 일본이 주관하는 어떤 행사에서 지휘를 했다나. 애국가의 가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썼다는데, 이 일에 대해선 또 말이 없다.

겪을 때마다 나는 이런 논쟁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소화되지 않은 체증 같다. 110년 전 시작된 어느 누구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얽히고 뒤섞인 일들을 꺼내 목소리 높여 애국을 부르짖는 일은 언제까지 반복될까.


-저는 사람들의 역사는 정의와 상처와 억압을 포함한 복잡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고 서로 다른 역사를 관대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말했던 것처럼 ,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은 전 세계에서 그토록 작은 지역에 불과하기 문입니다. 사람을 분리시키는 정책은 결코 온전히 실행될 수 없습니다. (…) 어느 곳이든 똑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이드)


평행은 두 직선이나 평면이 무한하게 연장하여도 만나지 않고 나란히 나감을 의미한다. 역설은 표현 구조상이나 상직적으로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다. 나는 이 두 개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읽는 내내 고민했다. 책을 덮을 무렵에야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서로 다른 관점, 정체성을 가진 두 존재는 평행을 이루지만 역설적으로 떼어 놓을 수도 없다.


-우리를 미워했던 사람들을 일반화해서 비판할 그 어떤 권리도 제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박해한 바로 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우리도 곤두박질치고 말 테니까요. (바렌보임)



#『평행과 역설』에드워드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노승림 옮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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