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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5. 2020

콩잎에 단풍 들면

가을을 요리하다


시월의 들녘엔 햇빛이 낭창하다. 여름을 지낸 풀과 나무, 밭의 작물은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살의 향연을 마음껏 누린다. 옥수숫대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힘을 잃으면 콩잎도 물이 든다.


이맘 때면 잎을 따줘야 한다. 햇살이 콩 꼬투리 구석구석을 찾아가도록. 흙에 남은 마지막 양분까지 콩이 먹을 수 있도록. 꼬투리가 튼실하게 여물어 고개를 늘어뜨리도록. 

타닥타닥 꼬투리에서 튀어나올 콩을 상상하며 콩잎을 훑는다. 미련 남은 푸른 잎과 단풍 든 노란 잎. 어머니 손등의 검버섯 같은 갈색 반점. 어느새 손엔 콩잎이 한가득이다.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을 찾아 올라온 떡잎을 본 게 아득한 옛날 같다. 가지는 뻗고 잎은 무성해졌다. 뜨거운 여름에도 바람 한 가닥이 콩잎은 사각사각 노래했다. 이제 콩잎은 충분히 소임을 다했다. 흙으로 돌아갈 시간. 하지만 이 고소한 콩잎을 그냥 보낼 순 없지.


 소쿠리에 담긴 콩잎이 부스스하다. 마치 전 날 파티를 끝낸 연회장처럼. 나는 허리에 콩잎 소쿠리를 끼고 가을을 요리하러 간다.




한국인의 식탁에 빠트릴 수 없는 게 김치다. 산해진미를 차려놓아도 사람들은 김치를 찾는다.

"참, 그 집에 김치 없었지." 잘 먹고 돌아서며 타박한다.

그래서인지 온갖 재료로 김치를 담는다. 배추김치는 기본이고 보쌈김치, 열무김치, 부추김치, 파김치, 고추김치. 거기다 조금 특별한 재료를 덧붙이자면 우엉김치, 양배추 김치, 양파김치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만들려는 김치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단풍 든 콩잎 김치.


잘 간추려 켜켜이 포갠 콩잎을 실로 동여맨다. 콩잎은 다소곳하다. 나풀대던 게 언제인가 싶다. 독에 물을 붓고 소금을 섞는 후  묶음씩 바닥에 앉힌다. 손으로 편평하게 누르고 누름돌을 얹자 콩잎은 물을 먹고 얌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 뚜껑을 여니 독 안의 물이 거무스름하다. 콩잎의 푸른 빛깔은 어느 틈에 자취를 감췄다. 그나마 있던 풀기도 사라져 콩잎은 마치 비 맞은 낙엽 같다. 걸을 기력 없는 노인 같기도 하다. 콩잎은 제대로 삭았다. 냄새가 쿰쿰하다. 익숙해서 반갑지만, 처음 맡는 이는… 글쎄, 뭐라 말할까? 이젠 소금기를 빼야 할 차례다.


콩잎이 투덜댄다. 그리 많이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젠 또 씻어내다니. 그러게. 다 이유가 있단다. 이건 자기를 비우는 음식이거든. 소금기를 뺀  콩잎을 뜨거운 물에 튀긴다.


"힘든 일이 어디 한두 번이가. 이런 일 저런 일 겪고 나니 웬만한 건 놀랍지도 않더라."

온갖 신고를 겪고 난 콩잎은 부드럽고 야들야들해졌다. 잎맥이 도드라졌다. 투명한 잎 너머로 쌀밥이, 젓가락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보이려 한다.


"맛있게 한다고 욕심 내서 양념으로 도배하면 못 쓴다. 뭐든 적당해야 한데이.  장 걸러 양념 얹어."


 


음식은 기억인지 모른다.

“군대에 있으니, 이게 얼마나 생각나던지….”

남동생이 제대하고 온다는 소식을 듣자 어머니는 독에서 삭힌 콩잎을 꺼냈다.


"갸가 이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하얀 쌀 밥 위에 얹은 노란 콩잎은 종잇장 같기도 하고 낙엽 같기도 하고 가을 같기도 했다. 고봉으로 담은 하얀 밥에 콩잎 김치를 얹어 뜨거운 김을 후후 불며 던 동생의 맹렬한 식욕과 그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던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딸 셋을 연이어 낳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젊은 시어머니 밑에서 은근히 주눅 들었던 맏며느리그제야 어깨를  수 있었다.

어머니 마음의 중심엔 늘 동생이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때때로 질투했고 때때로 서러웠다.




멸치 액젓과 고춧가루, 마늘에 버무린 단풍 든 콩잎 김치는 유독 우리 동네에만 있었던 걸까? 결혼 후 집을 떠나 타지에서 살게 된 나는 장에 갈 때마다 콩잎을 찾았다. 콩잎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깻잎이었다. 삭힌 콩잎은 귀했다. 어머니에게 구해달라 하고 싶었다.


맵고, 짜고, 쓰고, 시고, 단맛을 음식의 오미(五味)라 한다. 요즘은 고소함과 담백함, 감칠맛도 보탠다. 나는 거기에 씹는 맛을 더하고 싶다. 부드럽고 찰진 인절미의 식감이 고소함을 배가하듯.


어금니로 지그시 콩잎을 씹는다. 질기지도 무르지도 않은 콩잎은 마른 볏짚의 향내를 풍기며 아쉽게 잘라진다. 묘하게 다정하면서 쓸쓸한 맛이다. 콩잎의 이 질깃한 식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입에 단 음식들, 기름지고 설탕 범벅인 음식을 먹다가 이 까칠하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 몸의 군더더기가 모두 빠져나갈 것 같다. 씻겨 내려갈 것 같다.


풀 같다고, 소가 먹는 거 아니냐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엔 콩잎 김치 구할 수 없냐고, 내게  물었다.


“이건 특별한 음식이에요. 태양과 흙, 빗물이 준 선물이죠. 희생이며 결실이고, 무엇보다 인내와 기다림이 만든 소울푸드(Soul Food)랍니다."





기억하는 이에게 과거는 늘 현재가 된다.


단풍 든 콩잎 김치는 단시간에 뚝딱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가을볕에 콩잎이 누렇게 단풍 들면 나는 항상 옛적의 어느 시기와 가족이 떠오른다. 삭힌 콩잎을 꺼내 김치를 만들 때면 여든다섯, 이제는 말도 어눌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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