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인생은> 서영식 에세이집
몹시 외롭고, 막막하고, 지치는 날이 있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혼자 앉아
불을 끈 채로 한 덩어리 어둠이 되어 있다가
겨우 일어나 막차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사무실을 걸어 나와 골목을 지날 때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정거장횟집의 수조를 보았다.
늘 스쳐 지나가는 수조가 그날은 왜 그렇게 커 보였을까.
텅 빈 수조 안에는 멍게 한 마리가 가라앉아 있었는데
멍게를 보는 순간 나는 왜, 갑자기 울컥해져 버렸는지.
어쩌자고 멍게를 붙들고 엉엉 울고만 싶었는지.
수조 바닥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는 멍게와
세상에 납작 엎드려 가만히 살아 있는 내가 다르지 않아서,
온종일 멍게를 들쑤셨을 성가신 뜰채와
나를 들쑤신 성가신 하루가 다르지 않아서,
수조 속을 이리저리 굴러 간신히 살아 남은 멍게의 밤과
만신창이가 되어 간신히 걸음을 떼는
나의 밤이 다르지 않아서
여기가 물인지 뭍인지 가늠할 수 없던 밤.
곤히 잠든 멍게를 흔들어 깨워
소주 한 잔 부어 주고 싶던 밤.
막차는 놓쳤으나 한없이 걸어도 좋았던 밤.
멍게에게 인사 하나 남기고, 그리도 편안했던 밤.
고맙다, 멍게.
잘자라, 멍게!
이렇게 따뜻하고 시적인 마음을 가진 서영식은 누구일까. 이 사람과 정말 소주 한잔 마시고 싶지 않은가? 나는 마셨다. 서영식과 소주를. 오랜 세월을 두고. 누군가와 소주를 마셨고 앞으로도 마실거라는 사실이 이렇게 기뻤던 적이 없다.
귀공자 타입으로 희멀겋게 생겼지만 서영식은 노동자다. 사장님이지만 그는 분명 노동자다. 사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다. 위의 글이 증명한다.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서영식의 삶은 늘 고단하지만 그는 세상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상을 계도하거나 지도편달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관찰한다. 타고난 시인의 눈으로. 그의 시선이 닿을 때 이 사소한 세상의 사소한 것들은 죽었던 나비가 되살아나 날개짓하듯 놀라움으로 거듭나지만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본래부터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것이 서영식의 방식이고 가르침이다. 분노하되 증오에 물들지 않고 투쟁하되 타도하지 않으며 사랑하되 독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영식은 시를 쓰고 삶을 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사소하고 쓸쓸한 것들을 연민하지만 서영식이 계급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나비와 멍게가 계급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치와 비슷하다. 서영식은 도덕주의자보다는 자연주의자에 가깝다.
가끔 허허롭고 쓸쓸해서 서영식에게 전화하면 서영식은 한 잔 걸치고 마지막 전철을 타고 귀가 중이거나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있었다. 소주처럼 맑은 서영식의 음성을 듣고서야 쓸쓸한 내가 쓸쓸한 서영식에게 전화해도 그건 쓸쓸한 일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곤 조바심이 났다. 이 세상의 소주가 동날 일은 없겠지만 이 막차같은 세상에서 더 쓸쓸해지기 전에 서영식과 얼른 소주를 마시고 싶어서 나는 마음이 다급해지곤했다.
<툭하면, 인생은> 은 고되고 쓸쓸한 날들 가운데 서영식에게 강림했던 일상의 작은 깨달음들을 시라고 해도 좋고 산문이라고 해도 좋을 문체로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위 '잘자라, 멍게'는 36페이지에 나온다. 나머지 글들도 전부 그렇게 따듯하고 뭉클하다. 읽다가 한번에 다 읽어내리기가 아까워 잠시 멈추는 책이 있다면 이 책이 그 책이다. 그림이나 사진도 정성스럽고 애틋하다.
혹시 제목만 보고 가볍고 트렌디한 책일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무겁고 답답한 얘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쓸 수 있다는 사실에서 서영식의 오랜 숙고와 사색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서영식은 두루뭉실하게 위로하려들지 않고 가르치려들지 않고 설교하려들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게 기존의 유행하는 구루(Guru)들과 다르다. 하지만 가식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서점에서 훑어본다면 248 페이지 부근은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읽다가 주책맞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렀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맹세코 술 한잔 대접하겠다. 그리곤 또 한번 같이 울어도 좋겠다. 우리 모두는 외롭고 쓸쓸했으므로,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가난했으므로...
가련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부둥켜안고 한바탕 울고 싶다면, 혹은 자신없고 지치고 외로울때 주변에 친구는 커녕 멍게껍질조차 없다면 이 책을 집어드시길. 왜 우리는 슬플 때도 울고 기쁠때도 우는지, '눈물은 왜 짠지' 거기에 다 적혀있다.
ps. 서영식이 딸과 자작곡 '멍게송'을 부른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8xzLCehzD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