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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r 10. 2016

'그렇다'와 '그러해야한다'

유교사상에 내재된 긴장

1. 불교와 유교 기본 컨셉에 대한 초간단 설명

불교는 이 세계의 참된 존재방식을 깨닫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말한다. '이 세계와 나 자신의 참된 존재방식(실상)을 깨우침 = 행복/해탈/득도' 라는 것이다. 유교는 "하늘이 만물에게 각기 품성(기본 성질)을 내리니 그 품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중용>" 라고 선언한다.  이후, '그 말들이 다 뭐란 말이냐'하면서 불교나 유교의 논의가 엄청 복잡해진다. 일종의 해석의 역사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와 유교의 기본 프레임은 비슷하다. 사실/존재(Sein)로부터 가치/당위(Sollen)의 도출이다.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공함, 무상함, 하늘이 품성을 부여함)으로부터 삶의 지향점(가치, 당위)인 자비/도덕적 행위가 도출된다. '세상/사람이 이러이러하게 생겼으니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형식이다. 이런 프레임이 불교에서는 나름 논리적이고 자연스럽다.


2. 문제는 어디에?

그런데 유교에서는 다소간의 비약이 발생한다. 위에서 인용한 <중용>의 첫 문장, "하늘이 (만물에게) 품성을 부여했다"가 의인화된 표현임을 감안해도 만물에 나름의 성질이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런데 맹자는 인간의 그 품성/성질이 '선천적으로 선함'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이미 맹자 당대에 이를 두고 심각한 도전이 들어온다. <순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문제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명제가 참인 명제가 아니라는 점이다(그렇다고 거짓명제도 아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은 선한 존재이다'와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논리적으로 별개의 주장이란 사실이다. 앞의 것은 팩트의 문제이고 뒤의 것은 밸류의 문제이다. 즉, 논리적으로 하나에서 하나가 도출되는 필연성이 없다는 말이다.


a.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착하게 살아야 한다'

b. '인간은 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


유교에서 주장하는 바는 b. 이다. 하지만 a. 의 경우에도 결과는 같다. 순자의 주장이 a. 에 가깝다. 결국 위에서 보듯이 인간이 선한 존재이든 악한 존재이든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인간은 선하든 악하든 상관없이 선해야 한다. 일종의 칸트적 정언명령이다.


유교의 문제는 '인간은 선한 존재이다' 라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여부를 확인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설령 그 주장이 옳다고 해도 그것으로부터 '인간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꼭 도출되는 것도 아니란 사실이다. 그런 사실 유무/여부와 무관하게 인간은 선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유교는 왜?

그럼 왜 유교, 엄밀히 말하면 신유학/성리학/주자학은 그렇게 주장을 했을까. 불교 때문이다. 불교의 형이상학 체계를 빌어와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자니 모양을 비슷하게 가져간 것이다. 왜 불교의 체계를 가져왔냐고? 원래 유교에는 형이상학이 없었으니까. 혹은 매우 빈약했으니까.


세련되고 웅혼한 불교 형이상학의 맛을 본 당송(唐宋)대 지식인들을 우리쪽(?)으로 끌어 오려면 불교 못지않은 형이상학 체계를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유학/성리학/주자학을 설계한 사람들은 이미 불교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야 했다.



논의를 극도로 압축해서 전개했기 때문에 비약이나 생략이 있음을 피할 수 없다. 그 덕분에 논지가 그릇되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오류를 지적해 준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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