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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r 20. 2016

무엇이 정해진 것인가

'자연스러움'에 대한 소고

동성애를 죄악시하거나 혐오하는 종교적 이유중 하나는 그것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신은 양성, 음성 두 개의 성만을 창조했으며 자연의 이치 또한 그러할진대 동성이 서로를 사랑하느니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신과 자연의 이치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연의 실제 모습은 동성애와 성전환 등등의 현상들로 넘쳐난다. 수컷으로 태어났다가 암컷으로 성을 바꾸거나 암컷이었다가 수컷으로 성을 바꾸는 물고기들의 사례는 생물학에서는 흔한 사례이다. 심지어 암수가 한 몸인 생물(대표적으로 꽃)도 허다하며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는 다른 수컷의 도움으로 알을 낳은 후 기르기는 둘이 기른다. 게다가 어느 개미집단의 여왕 개미는 각기 다른 두 종류의 수컷과 교미를 해야 알을 낳는다. 즉 양성(兩性)이 아니라 삼성(三性)인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자연에 가득하다.  


이렇게 보면 정작 자연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성은 단 두 개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결코 고정된 것도 아니란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나 성전환이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지의 소산이고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발언이다. 적어도 자연에는 태어날 때 성이 결정되고 그 결정대로 살아야 하며 죽을 때도 그래야 한다는 당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부일처제의 번식체계는 자연에서는 오히려 소수적 방식에 속하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티베트에는 '엄마와 아빠는 각각 한 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란 우리가 속한 특정 문화의 잠정적 맥락에 기반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잠정적인 이유는 그 문화 또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사람이 말하는 자연스러움과 티베트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스러움, 조선시대 조상들이 말하는 자연스러움과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이 일치하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바로 이런 사태에서 도덕적 긴장이 존재한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만의 편협된 시각이고 그조차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간다는 사실, 우리 삶의 근거인 도덕조차 그러한 운명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존립과 정체성을 보장해 줄 불변의 진리가 자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니, '우리의 존립과 정체성을 보장해줄 불변의 진리는 자연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자연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금강경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가르친다.


여기까지 오면 '그럼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행동할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맞다. 우리는 시시각각 도덕적 판단과 행동을 해야하고 그러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말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신념을 보장해줄 절대적 기준/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겐 필연적으로 열린 태도와 관용, 겸손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 목적일 때만 어떤 투쟁은 정당화 될 것이다.



* 이 글은 모 매체에 기고했던 것을 수정한 것입니다.




정해진건 없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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