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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r 28. 2016

시지프스를 위하여

삶의 의미에 대하여 (2)

실존주의는 삶의 무의미함을 말한다. 아니, 존재의 무의미함이 더 정확하겠다. 존재의 무의미함이란 무슨 말인가. 그 말은 '존재의 의미'와 반대되는 말인가. '존재의 의미'란 무슨 말인가.


실존주의적 무의미란 가령, '길가의 잡초 한 포기도 그냥 있는게 아니다'는 입장(목적론)과 반대되는 입장이다. 길가의 잡초 한 포기도 그냥 있는게 아니란 말은 그 존재의 의미, 존재의 목적을 시사한다. 그냥 있는게 아니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실존주의는 그 반대를 말한다. (참고로, 하나의 철학사조로서의 실존주의는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유통기한은 이미 끝났다.)


존재의 본질은 우연이다. 이 세계와 그 구성원들의 존재는 우연의 소산이다. 신의 영광을 위한 일도 아니고 그 어떤 목적이나 이유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인식하는 우리와 저 차갑고 맹목적인 우주는 너무도 다르다. 그 다름이 아마도 까뮈에게는 부조리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수긍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주가 차갑고 우연한 존재이며 우리는 그 자식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이 세계가 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존재하는 것들의 내용과 형식도 거기에 걸맞게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 세계의 존립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의미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목적없이, 의미없이 살아야 하는가. 그게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가? 그렇게 살고 싶어? 목적없이, 의미없이? 그렇게 살아야만 해?


이 세계는 우연하고 맹목적이며 무목적한 존재이고 우리가 그 자식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무의미하고 무목적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이 세계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이 우리가 허무하게 살아야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거꾸로, 자비로운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운행한다고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허무에 빠질 수 있다. 사실 니체는 그게 더 허무한 일이라고 말했다.


허무주의는 비관주의도 아니고 염세주의도 아니다.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이 세계는 실로 허무하다. 그 존재의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다. 우리를 구속하는건 이 우주에 아무 것도 없다. 삶의 의미를 정하는 것도 우리 몫이고 거기에 걸맞게 살아내야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도편달하는 존재 따위는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그것은 또한 인문주의, 휴머니즘의 강령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책임자이며 주인공이니, 바쁘다. 허무해할 틈이 없다.


신나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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