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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r 31. 2016

우연과 필연 감별법

니네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누군가 말했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


사실일까.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난다는 말은 일종의 숙명론으로 태초에 이미 만날 사람이 정해져 있고 그건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정해져 있는가.


필연과 우연을 구분하는 철학적 방법이 있다. 철학(양상논리학)에서는 어떤 일이 반드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면 필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으면 우연으로 판단한다. 아주 간단하다. 가령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되는데 그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건 필연이다. 사람이 죽지 않을 도리는 없다. 따라서 그것도 필연이다.

철수는 학교를 졸업후 교사가 되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철수가 교사가 된 사건은 우연이다. 철수가 단체미팅을 나가서 마음에 점찍은 아가씨가 있었는데 어쩌다 그 옆의 아가씨와 커플이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철수와 '옆의 아가씨'는 만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점에서 철수와 옆의 아가씨의 만남은 우연이다.


철학 교과서는 이것을 두고 '반사실문이 성립하면 우연이고 반사실문이 성립하지 않으면 필연이다'라고 말한다. 즉, 다른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다면 우연이고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없다면 필연이다. 사람이 죽지 않을(영원히 사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1+1이 2가 안될 경우는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필연이다. 글자 그대로 '반드시 그러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우연이다.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고, 어떤 직장을 얻고... 그 무수한 일들은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었단 말이다. 따라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일들은 다 우연한 것들이다. 우리는 늘 가능성을 점치고 확률을 따지다가 에잇, 하며 주사위를 던진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아쉽지만 그건 우연이다. 사람들은 '필연적 사랑'이라는게 존재하고 그게 무척 신비롭고 숭고하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논리적으로(그러므로 사실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피해도 피할 수 없는 것, 이미 정해진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할까. 당신이 재벌 회장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재벌 회장이 될 수 밖에 없다면 그게 그렇게 가치있고 소중할까. 아니면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재벌 회장이 되는게 더 가치있을까.


헤어질 뻔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해서 다시 사랑의 불씨를 살리고 지피는게 소중할까, 샴쌍둥이처럼 떨어질 가능성조차 아예 없어서 그런건 생각도 안하는게 소중할까. 물론 샴쌍둥이처럼 아예 붙어있으면 애초에 근심도 없고 슬픔도 없다고 하겠지.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과연?


내 삶의 플랜이 태초에 다 짜여져 있고 루트가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나의 노력은, 의지는 다 무슨 소용인가. 그냥 눈감고 몸에 힘을 다 빼고 있어도 내 삶은 그리로 굴러갈텐데 무슨 성취의 기쁨이 있고 실패의 아픔이 있겠는가. 인생 자체가 성립하겠는가.


우리 삶의 대부분은 우연한 사건들로 채워진다. 심지어 탄생조차 우연이었다. 필연적인 건 죽음 뿐이다. 인생에서 죽음 빼고는 다 내가 하기나름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내 삶은 내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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