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뉴에이지, 미니멀리즘..
독일의 ECM은 재즈나 뉴에이지, 클래식 등을 주로 만드는 레이블이다. 그들의 사운드는 투명하고도 차가운 샘물같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북유럽의 재즈 사운드는 스윙이나 비밥을 구현하는 정통 아메리칸 재즈와는 대서양의 간극만큼이나 많이 다르다(물론 현대 미국의 재즈 또한 스윙이나 비밥의 전통으로부터 멀리와있기는 마찬가지지만). 재즈 레이블하면 미국의 Blue Note가 단연 독보적인데 Blue Note가 미국의 정서를 대변한다면 ECM은 유럽(으로 대표되는 다른 세계) 재즈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ECM 레이블을 이야기 할 때 앨범커버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히 앨범 커버로서의 기능 뿐만 아니라 해당 음악의 컬러까지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ECM 음반의 커버 디자인은 어둡고 짙은 무채색, 혹은 청록색 계열의 모노크롬 색조를 기반으로 극히 추상화된 바다, 하늘, 숲 등의 풍경그림이 주를 이룬다. 그 풍경속에서 세계는 폭풍우가 치고 불빛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인적은 자취가 없다. 거기에 앨범 타이틀이나 음악가를 표시하는 폰트는 극히 실용적인 기능만 할 뿐이고 여타의 장식은 철저히 배제된다. 전체적으로 ECM의 음반 디자인은 음울하고도 내성적이다. 멀리서 보면 그 이미지들은 사바세계 중생들의 소용돌이치는 마음속을 찍어 놓은 듯도 싶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 또한 커버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키스자렛으로 대표되는 그 느낌, 스윙이나 비밥의 화성보다는 마일즈 데이비스 스타일의 미니멀하고 정적인 화성, 음과 음들을 침묵이 연결하고 침묵과 침묵을 음들이 연결하는 형태, 그래서 아무리 크고 빠르게 연주해도 고요하기만 한 형태 (시끄러운 것은 아무리 느리고 작게 연주해도 시끄러럽듯이), 표면의 흔들리는 바다와 그 밑의 고요한 바다가 둘이 아니라는 원효의 생각처럼...
요리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가 물이라면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는 침묵일 것이다. 하지만 물만 가지고 요리를 만들 수 없듯이 침묵만을 음반에 담아 판매할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캐나다의 어느 재즈 매거진은 ECM의 음악을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라고 했다. 침묵으로부터 뛰쳐나왔거나, 곧 침묵으로 돌아갈, 반은 침묵이고 반은 소리인 소리, 혹은 반은 침묵이고 반은 소리인 침묵이 ECM의 음악이다.
한동안 우리나라 재즈 음악가중 이런 스타일의 연주자가 없나 찾아보았는데 송영주의 음악이 다소 비슷한 듯 했다. 전체적으로 그녀의 음악은 노르웨이로 대표되는 북유럽 재즈의 정서에 적극 찬동하면서도 스탠다드한 모던 재즈의 감각을 놓지않고 있다. 나는 그녀의 연주가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적 레벨에서도 정상급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최근에 나온 그녀의 음반들은 앨범 디자인도 ECM의 그것과 비슷하다.
ECM의 소속의 음악가라면 펫 메스니나 키스 자렛, 랄프 터너 정도가 많이 알려진 축에 속하는데 그 외의 어떤 음악가들은 벅스 뮤직 검색에서 보이지않아 아쉽다.
최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뭐냐하면 ECM 레이블의 음반들은 첫 곡(1번 트랙)이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항상 5초 있다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연히 발견했다가 호기심이 동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앨범들을 조사해 보니 한결같이 그랬다. 이에 반해 다른 레이블의 앨범들은 그냥 1초만에 시작하는 등 제각각이었다. 메일이라도 보내서 왜 이렇게 하는지 물어보아야 하나, 이러고 있다.
명상을 하기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하다면 ECM의 음반들을 권하고 싶다. 명상으로부터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가기위한 마무리 운동이 필요할때도....
The Most Beautiful Sound Next To Sil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