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owne Feb 29. 2016

한나 아렌트

환멸이 희망에게, 영원과 불멸의 차이..

한나 아렌트.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이방인(유태인)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여자,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별칭을 얻은 실천적 지식인...

레비나스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태인 철학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공통된 분위기, 환멸스럽고 비극적인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가지는 절망과 그 절망을 넘어서려는 따뜻한 용기와 애정, 세계와 삶에 대한 실천적 비전, 그런 것들을 아렌트에게서도 본다.

그들 - 아렌트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유태인 철학자들’ - 은 인간이 인간을 말살하는데 체계적으로 동원된 과학기술과 도구적 이성, 정치적, 기술적 전체주의와 일상화된 악 앞에 전율하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성찰하고 제시한다.
레비나스와 현상학적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태인들 특유의 공동체적 가치관에서일까, 아렌트도 레비나스처럼 타자로 향하는 관심과 인간적 연대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고 버려졌던 그들이 먼저 그런 철학을 주창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아렌트의 제자뻘되는 하버마스에게와서 이것은 합리적 소통의 문제로 계승된다.

지구라는 떨칠 수 없는 삶의 조건, 탄생성과 사멸성, 노동의 필연성, 이런 삶의 조건들에서 우리는 영원을 꿈꿀 수 없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할 때만 가능한 철학자들의 몫일 뿐 우리는 서로의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기억됨으로써만이 불멸을 꿈꾼다. 인간의 역사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것들의 역사가 아니라 시간속에서 반짝이는 불멸하는 것들의 역사이다. 아마도 그 불멸은 필멸하는 것으로서의 불멸일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시간 안에서 태어나 시간 안에서 죽는다. 우리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실에 저항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속으로 뛰어들려던, 사람의 영토밖에 거주함으로써 영원성을 보존하려던 현인들을 닮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시간 안에서, 가족들과 후손들,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되고, 기억되고, 그들의 추억이 되는 방식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런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살았다.

인간은 서로에게 하나의 이야기이고 가슴속에 남는 불멸의 추억이고 ‘자유’를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그렇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종種이다. 그 모든 것은 ‘사유함’에서 찾아진다. '악'은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아렌트는 말한다,


슬픈 진실은, 대부분의 악은 선이나 악을 생각해보지 않은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