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우리는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저 질문은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인정할때 가능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축약하면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해, 근데 왜?"
1. 신의 명령
신이 우리에게 도덕적이길 요구했다. OK. 근데 그러다가 당신이 믿음을 포기하면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아도 되는가? ('그러니까 믿음을 포기하면 안된다'는 순환논리다.)
무신론자들은 도덕적일 의무가 없는가? 그들에게도 도덕의 의무가 있다면 딱히 신의 명령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혹시 유신론자들이 '우리의 도덕은 당신들의 도덕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많은 걸 추가로 설명해야하는 부담이 생긴다.
2. 사회계약설/공리주의
도덕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개개인들에게 이로운 것이고 이를 어기는 것은 사회의 존립에 위태로우므로 도덕의 준수는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것이다. 법은 도덕의 확장이며 계약의 룰이다. 그래? 그렇다면 당신과 계약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과는? 가령 당신이 탄 배가 난파되어 당신과 어떤 아기 하나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당신은 아기에게/와 아무런 의무나 계약관계가 없다. 그러니 아기를 그냥 죽게 두어도 괜찮은가. 왜 그러면 안되는가. 계약관계도 아니고 무인도는 일종의 '사회'도 아닌데.
3. 양심의 명령
양심이 아기를 그냥 죽게 두도록 하지 않는다고? 어떤 양심?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난 존재이므로 그 선한 본성을 따라야 한다 - 고 맹자가 주장했다. 정말? 악마로 태어나는 놈들도 꽤 있는거 같은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 도덕적 머뭇거림
가령, 철수와 영희가 친남매라고 하자. 둘은 어느날 섹스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조건은 딱 한번만, 물론 영원히 비밀을 지키고, 피임에 대한 안전책을 갖춘후... 그리고 둘은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딱 한번만 하기로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래도 안된다고? 왜? 근친상간은 나쁘니까? 그래서 딱 한번만, 안전하게 했다잖아. 그래도 안된다고? 왜?
물론 우리는 그것이 유전학적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궁극적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도 그 사실을 알아서 광범위하게 근친상간을 피하는 문명을 건설했을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학적) 이유는 몰랐지만, 그래서 딱히 설명은 못했지만 조상들도 근친상간은 꺼림찍하게 여겼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문명에서 관찰되는 혼인의 형태는 족외혼이다.
이것을 '도덕적 머뭇거림(moral murmuring)'이라고 한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옳지않음을 느끼는 것. 간단히 설명하면 오랜 진화적 체험을 통해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아는 것이다. 멘델이나 다윈의 발견은 19세기나 되어서야 가능했지만 이미 우리 조상들은 본능적 유전학자들이었다.
5. 그냥 그래야 한다
그냥 그래야 한다. 그게 옳으니까. 왜 옳으냐고. 그냥 옳다. 그 이유를 따지는 일은 4살짜리가 끝없는 질문으로 엄마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엄마는 결국 소리칠 것이다. "그냥 그런거야"
'왜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하지만 질문을 아무리 파헤쳐도 우리는 정답의 심층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이 철학의 숙명, 더 나아가 이성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우린 우리 삶을 관통하는 많은 문제들의 답을 다 알지 못하고, 그럴 가망성 여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래야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아서 도덕을 추구하는게 아니다. 그냥 그게 당연하고 옳으니까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지 방정식을 풀듯 그것의 논리적, 합리적 해답을 구한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이성(비이성이 아니라), 즉 이성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선택이나 결단의 문제일까.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도덕적이고 싶은가' 더 나아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도덕적이어야할 궁극적 이유는 없다.
어떤 삶을 택할지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