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앞바다, 칼이 아닌 대포
임진왜란이 발발한 일본 국내적, 국제정치적 배경... 따위는 생략하고 왜 일본 수군이랑 이순신 장군은 하필 이 땅의 서쪽 귀퉁이, 해남의 바다에서 사활을 걸고 붙어야 했나, 그 얘기만 해보자.
1. 왜 해남 앞바다였나
결론은 왜군의 병참라인 확보 때문이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육로를 통해 물자와 인력을 북쪽으로 공급하는 육상루트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힘들고 짜증나는 코스였다. 도로가 발달되지도 않았고 곳곳에서 의병들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자 수송부대가 운반하던 식량을 다 먹어치우는 경우도 있었다니 뭘 더 말하겠는가. 그래서 히데요시의 참모부는 육로를 거치지 않고 서해로 진출하여 한반도의 중심, 가령 인천같은 곳으로 곧장 나아가자,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다.
본래 일본 수군은 조선의 연안을 노략질하던 해적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원거리 항해능력이 부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순신이고 뭐고 따질거 없이 먼바다로 빙 돌아 한반도 중심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시간이나 경비도 문제라 일본 수군은 부득이 연안을 따라 움직여야 했고, 그래서 불가피하게 해남 앞바다를 지나야 했고, 그 덕분에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그곳을 지켜야했다.
이순신 장군은 '동쪽에서 몰려오는 적들이 서쪽으로 못 넘어가게 한다' 요거 하나에 올인했다. 이런 생각을 도망간 선조와 그 주변의 무리들은 알 리가 없었다. 아무 방책도 없는 그들은 그저 '어서 나가서 싸워라, 왜 너는 거기서 그러고만 있느냐'고 멀리서 발만 굴렀다. 원균이 그래서 기동했다가 심하게 망가진거 아닌가. 12척으로 일으킨 기적은 원균의 삽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만약 해남 앞바다 루트가 뚫려 곡창지대 전라도를 감싸고 도는 일본의 병참라인이 확보되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찌되었을까. 일본군이 동쪽, 동해안 루트를 택하지 않은 것은 등뼈같은 태백산맥이 버티고 있고 그걸 넘어서도 한양까지 한참을 가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뻔한 얘기다.
2. 왜 칼이 아닌가
일본 수군은 수군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배를 탄 칼잡이'들이었다. 놈들은 본래 '배를 타고 연안을 떠돌며 노략질함'이 주된 기동내역이었다. 본질적 의미의 해군이 아닌 것이다. 해적영화를 떠올려보면 된다. 해적들은 어쨌든 상대방에 배를 붙여서, 그쪽으로 건너가 챙챙챙 칼 싸움을 해야 했다. 그래야 물건도 약탈하고 사람도 잡을 수 있었다. 해적이 베이스인 일본 수군의 발상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반대로 생각했다. (그러니) 저 놈들과 배를 닿지 않는다, 닿지 않고 멀리서 포를 쏜다, 이게 기본 컨셉이었다. 근대 함포전의 단초가 되는 이 컨셉은 훨씬 후대가 되어야 서양의 해군에 도입되었다.
거북선의 등에 창을 꼽은 것도 일본놈들이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발상에서였다. 영화 명량을 보아도 일본 놈들은 기를 쓰고 이쪽 배에 오르려 하고 반대로 이쪽은 기를 쓰고 못 오르게 한다. 노략질로 잔뼈가 굵은 실전형 칼잡이들을 조선의 정규군이 일대일로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거북선이 빠른 기동으로 일본 수군의 전열을 흩뜨리면 우리 본진이 멀리서 일자진 따위로 늘어서서 포를 쏜다, 이러면 칼잡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 것이다. 우리 수군에게 중요한 것은 칼이 아니라 화약이었다.
울돌목에서 물살이 바뀌는 타이밍을 노려 적들을 궤멸시킨 신화적이고도 눈물겨운 전투는 더 말하지 않기로 하자. 민간의 백성들이 피난가기를 멈추고 자신들의 배를 끌고와 장군을 도왔다는 그 이야기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기적같았던 해전의 기획자, 모든 해군 전략가들이 겸손히 고개 숙이는 장군들의 장군,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 거칠고 압축적으로 설명하여 생략과 과장이 있습니다. 이 점 참조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