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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루캐리 Aug 29. 2022

무엇을 집어도 지독하게 쓴 초콜릿 상자

첫 직장, 여기는 지옥인가요

생일쯤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대형 카드사 최종면접에서 탈락하고 4학년 2학기 기말고사도 대차게 말아먹었다. 물론 말아먹지 않았어도 이미 평점은 낮았지만. 어쩔 수 없이 졸업 연기를 선택했고 가난한 취준생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소서의 늪에 다시 빠져들었다. 언니에게 한 푼, 두 푼 빌린 돈은 어느새 1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졸업을 연기한 학기마저 거의 끝나가던 7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합격 소식을 드디어 받았다. 서울 소재 공공기관의 홍보팀이었다. 지원할 당시에는 공공기관인지도 몰랐고 세종시 이전 계획도 몰랐지만, 어쨌든 유일하게 합격한 곳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운전을 해도 편도 30km인 거리의 통근을 시작했고, 첫 월급을 받자마자 언니에게 100만 원을 갚았다. 언니는 지독하다며 혀를 찼지만.


첫 직장에서의 2년 6개월. 그 시간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여 녹음이 울창한 그곳은 때로 서울이 아닌 외국의 휴양지 같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출퇴근했고, 한 번은 딱따구리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자 사회지도층인 연구직 박사님들은 의외로 친절했다. 공공기관의 이름값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았고, 가끔 만나는 기자들 역시 전혀 무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시대에 정년 보장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그 달콤함을 버리고 나왔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 하면 역시 사람이다. 그것도 여러 유형의 사람.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야근 후 늦은 시간에 귀가하게 됐다. 실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잘 들어가라고 하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퇴근길에 치한이 덮치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었다. 대충 아 발로 차고 뛰어가야죠 같은 소리로 둘러댔더니, 잘못 반항하면 큰일 나니까 그냥 당하라나 뭐라나. 쎄한 느낌을 애써 무시했지만, 왜 쎄한 느낌은 언제나 맞는 건지. 그는 야한 농담을 사랑했다. 농담에만 그쳤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를 가리지도 않고 배설되는 농담은 2년 6개월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지금까지 생생한 순간도 있다. 을지로의 한 호텔에서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했다. 정말 싫지만 2차는 노래방이었다. 가기 싫어서 걸음이 절로 느려지는데, 뒤처진 나와 사수를 돌아본 실장은 도심 한복판에서 크게 외쳤다. "빨리 와, 기쁨조!" 게다가 할아버지뻘 박사와 블루스를 추라며 밀어대던 그 당당함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노래방에 따라간 과거의 어린 내가 불쌍하면서도 동시에 한심하다. 상습 실내 흡연은 그에 비하면 차라리 참을 만했다.


팀장 역시 인생에서 난생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실장이 야한 농담을 사랑했다면, 애 아빠인 그는 여자를 사랑했다. 본인의 스타일인 업체 직원과 데이트하고 싶다며 염불을 외웠다. 어찌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지, 그 직원의 얼굴은 잊어버렸는데 이름만큼은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낮에는 '못생긴 것들과 일하기 싫다'는 농담을 던지다가도 회식 후 술에 취해서는 너희들을 사랑한다며 껴안았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게다가 여자를 사랑하는 자가 어찌 술을 사랑하지 않으랴. 덕분에 성인 나이트에 처음으로 갔으며, 예쁜 언니가 옆에 앉아 안주를 잘라주는 술집에도 처음으로 가 봤다. 둘 다 워낙 충격적인 경험이라 지금도 기억난다. 한물 간 가요에 립싱크를 하던 성인 나이트의 공연자(?)들, 그리고 만취해 화장실에 널브러져 있는 내게 여명 808을 종이컵에 담아주던 친절한 술집 언니까지.


도덕성 또한 나와는 기준이 달랐다. 홍보팀과 오래 일했고 팀장과 특히 가까운 업체 직원이 있었다. 적어도 분기마다 함께 일했고, 일이 끝나면 다 같이 밥에 술을 먹었다. 그 친분으로 업체 직원의 결혼식 때 축가를 불러줬다. 그는 아이가 돌을 지난 무렵, 우리 팀과 술을 마신 후 집에 들어가던 내게 전화해 고백을 했다. 심지어 팀장은 그때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내게 그 직원이 '순수하다'며 두둔했다. 팀장 덕분에 나는 입사 3개월 만에 원인 불명의 발진과 간지러움에 시달렸다. 회사 근처의 작고 오래된 피부과에서는 오진을 했고, 대학병원에 가서야 장미색비강진이라는 걸 알게 됐다. 팀장의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회사 사람들은 나를 두고 '홍길동 증후군'에 걸렸다고 수군거렸다.


사수는 아주 밝고 싹싹해 유일한 정상인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청유형으로 부드럽게 의견을 물어보는 그녀를 좋아했고 잘 따랐다. 실장과 팀장에 비하면 천사였다. 팀장이 '못생긴 것들과 일하기 싫다'며 지나가면 사수가 '어머 저희도 팀장님 같은 아저씨랑 일하기 싫어요!'라며 받아치는 것까지도 너무 좋았다. 1년쯤 지난 후에는 그녀가 마냥 천사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청유형으로 묻는 건 단지 습관일 뿐이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지시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청유형으로 지시하던 그녀는 바로 삐져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다섯 번이든 열 번이든 청유형으로 물어보는 그녀의 말투는 퇴사할 때까지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퇴사한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괴로움은 여전히 생생하다. 실장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한다. 팀장과 사수는 같은 곳으로 이직해 나란히 잘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서로에게는 참 좋은 인연이다. 그 셋을 제외한 사람들과는 가끔 연락하며 지낸다. 다행히도 내가 다니던 당시의 그런 분위기는 이제 없다고 한다. 하필 그 시기에 심했고, 하필 그 팀이 너무나도 심했다고. 더 이상 아무도 괴롭지 않다면 다행이지.


하지만 내 속은 밴댕이보다 좁아 뒤끝이 심하다. 한 번씩 그 시절이 떠오를 때면 아직도 그들이 밉고, 불행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저 꼴을 인생 말년에 당하느니 사회 초년생 때 당한 게 낫지 않을까. 더러운 꼴은 볼 만큼 봤고, 이제 어지간한 또라이는 또라이로도 안 보인다.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놔두고 이제 그냥, 좀 놓을 때도 됐는데 말이지. 아직도 그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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