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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루캐리 Aug 29. 2022

업무추진식비와 유튜브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정년 보장에 안녕을 고하다

공공기관 홍보팀에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은 알콜로 점철되었다. 입사 첫날 점심, 삼겹살집에서 소맥을 말아주더니 급기야는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내게 내밀었다. 좌식이라 불편했던 오래된 정육식당에서 앞치마를 입고 트로트를 부르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난다. 하지만 현실은 싫다는 말도 못하고 매일이 술이었다. 배우 김희선이 토하고 마시고 토해서 '토마토'라던데 당시의 나 역시 토마토였다. 마시고 토하고 또 마셨다. 한 번은 점심부터 술을 먹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돌아와서 야근을 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비위생적인 잔 돌리기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부서 회식의 상당수는 이 기자, 저 기자의 이름을 빌려 업무추진식비로 처리됐다. 전가복도, 어복쟁반도, 복불고기도 모두 처음 먹어봤다. 비싼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지만 어차피 국민의 세금(법인카드)으로 먹는 건데, 그러면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먹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 그저 술이 지겨울 뿐이었다. 중국 음식을 먹을 때는 연태고량주나 공부가주, 나머지는 소주 아니면 소맥. 가장 자주 먹은 건 소고기다. 특히 회사 앞 고깃집에서는 질 좋은 소고기를 정말 지겨울 정도로 많이 먹었다. 소고기를 먹는 날은 소맥도 토할 때까지 먹는 날이라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한몫해 지금도 소고기를 선호하지 않는다.


마시고 토하기를 반복한 덕분에 잘 먹어도 살이 내리기만 했다. 하긴 그렇게 자주 토하는데 살이 찌기도 힘들겠지. 게다가 언젠가의 복날에는 기어코 보신탕집으로 데려갔다. 소주에 개고기를 억지로 먹다가 조용히 헛구역질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영원히 내 인생의 수치로 기록될 날이다.


층층이 쌓아 올린 술 경력에 비하면 업무 경력은 정말 미미했다. 그야말로 물경력이었다. 페이스북을 개설해 운영하고, 보고서 표지를 컨펌받고, 임원이 꽂힌 '프레지'를 만들고, 행사 사진을 찍고... 재미있는 건 역시 글을 쓰는 일이었지만 보도자료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연구자가 보도자료 초안을 쓰면 사수-팀장 순으로 윤문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언젠가 한 번 팀장이 모든 업무를 다 같이 하겠다며 내게 보도자료 윤문을 시키려 하자 사수가 반발해 일 주일이 넘도록 살얼음판이었다.


최악은 3년 차에 찾아왔다. 신문 모니터링을 도와주는 인턴이 그만두는 바람에 겨울철 한동안 매일 7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했다. 집에서 늦어도 6시에는 나가야 했고, 새벽달을 보며 출근했다. 여기에 유튜브 업무가 추가됐다. 사진 촬영용 '오두막 풀 세트'가 있으니 영상을 찍어 올리란다. 프리미어인지 베가스인지 유료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해주겠다며. 포토샵도 못 다루는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하라면 해야지. 혼자서 동영상 기획부터 촬영, 출연, 편집까지 다 했다. (그 동영상들은 유튜브에 박제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 달리 똥컴은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버티지 못했다. 회사 메신저 하나만 켜도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업무 종료 시간인 오후 6시부터 모든 프로그램을 닫은 후에야 동영상 편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택시를 타고 퇴근하기 일쑤였고, 그 시간의 택시는 빠른 길을 찾아 대개 (그 때만 해도 존재하던) 청량리 588을 지나갔다. 여러 가지로 최악이었다. 술 스트레스도, 사람 스트레스도 여전한 데다가 수면 시간이 부족해 눈이 빠질 것 같았다. 퇴근길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아도 그냥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분명 내 안에 쓰레기가 계속 차고 있는데, 생각보다 휴지통 용량이 컸다. 친언니는 진작부터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만 더 해보겠다며 미련하게 버티고 또 버텼다. 정년 보장 하나만 바라보며 뭘 위해서인지, 언제까지인지도 모르고 참던 나날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휴지통의 용량은 무한하지 않았다. 세종시 이전을 앞두고 누군가 역사관 프로젝트를 맡아야 했는데 팀장은 나를 지목했다. 하기 싫은 걸 떠나서 시간이 없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해 못하겠다고 하자 팀장이 말했다. “못 하는 게 어딨어?” 그 일곱 글자가 마침내 내 휴지통을 꽉 채웠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결심을 하지 못했던 마음이 마법처럼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휴지통을 비우기로 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공공기관을 제발로 걸어나가기로 한 것이다.


실장과 팀장을 싫어하던 부원장은 나의 퇴사를 빌미로 팀을 와해시키고 싶어 이런 저런 당근을 제시했지만 지친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모든 제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세종시 이전을 앞두고 퇴사가 결정되었고, 이직할 곳을 찾지 못해 백수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다. 띠동갑을 두 번은 돌아야 하는 연구직 박사님들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밥을 사주시면서도, 다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나를 걱정했다. 특히나 몇몇 분은 고생하는 나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했고 또 유독 신경 써주신 것을 알기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이제는 TV와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분들이라서 옛 시절과 비교하면 거리감이 엄청나지만, 매일매일 시들어가던 나를 지나치지 않고 물을 주던 분들임은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다.


대책도 없이 공공기관을 그만둔 그 애는 정년을 포기한 대신 수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공공기관을 그만뒀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나의 살길을 찾아 여기까지 열심히 걸어왔다. 언젠가는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불행이 보장되는 정년에 대해 그때도 지금도 미련은 없다. 선택도 내 몫, 책임도 내 몫, 그리고 지금의 행복도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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