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8개월 그리고 합격
퇴사를 준비하며, 쉬는 동안 꼭 일 주일 간 방콕을 다녀오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백수라는 타이틀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언제 면접을 보게될지 모른다는 마음에 쉽사리 항공권을 살 수 없었다. 8개월이라는 꽤 긴 기간을 무직 백수로 지냈으나, 계속된 취준과 면접으로 결국 제대로 된 여행 한 번을 가지 못했다. 이후로는 공백 없이 살고 있어 장기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몇 번이나 면접을 봤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으나 열 손가락으로 부족한 것은 확실하다. 공공기관에서의 경력을 살려 공익재단, 교육재단, 민간 싱크탱크에 지원했고, 업종 연관성은 없으나 대학교, 로펌, 수입차업체, 항공사, 엔터사 등의 면접도 봤다. 인하우스 홍보야 워낙 TO가 많지 않고, 나도 특별히 원하는 직종이 없었기에 적당히 이름값이 있다면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가장 특이했던 곳은 역시 엔터사다. 면접관들은 누가 봐도 일반적 직장인같지 않았다. 그들 역시 모범생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두 번의 면접을 거쳐 합격했고, 부서장은 합격 소식과 함께 당장 주말의 뮤지컬을 가는 걸로 시작하자고 했다. 예전에도 엔터사 면접을 보고 합격했으나 결국 가지 않았는데, 엔터 산업에 대한 환상과 로망을 버리지 못해 또 같은 일을 저질렀다. 결국 입사하지 않기로 했고, 내가 담당해야 했던 연예인들이 나중에 대형 사고를 친 걸 생각하면 천만 다행이다. 음악은 소비자의 입장으로만 즐겨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민간 싱크탱크의 1차 면접에서는 면접관이었던 대외협력팀장이 스스로의 별명을 '악마', '개X랄'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게 마음이 안 들면 2차 면접에 오지 않아도 좋다고.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합격했다고 전화가 왔고 단호하게 불참 의사를 밝혔다. 예상 가능한 또라이를 굳이 내 인생에 난입시킬 필요는 없지.
4년제 대학교 교직원 면접을 보러 가서 지방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총장면접에서 떨어졌으나 그와 나의 핀트가 너무나 맞지 않아 탈락을 예상할 수 있었던 데다가 어차피 지방에서 혼자 살 자신도 없었다. 사실 면접보다는 시장에서 혼자 사 먹은 물회가 더 기억에 남는다. 물회를 시켰는데 매운탕도 같이 주는 인심이란.
서울의 한 대학교 의료원은 이틀 동안 188명을 면접에 불렀고, 당연히 면접관들은 지루함을 온 몸으로 내뿜었다. 대학교나 협회의 면접은 전체적으로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비슷비슷한 질문과 비슷비슷한 대답, 그리고 끊임없는 면접자의 행렬에 지루해하는 면접관들.
막판에는 3일 동안 세 곳의 면접을 보는 강행군을 했다. 수입차업체의 1차 면접, 중소 IT기업과 교육재단의 최종면접이었다. 수입차업체 면접에는 임원 두 명과 실무자(차장) 한 명이 들어왔는데, 임원들은 말 잘 한다며 좋아해줬으나 실무자는 '실무 경험 부족한 너는 이 빡센 곳을 못 버틸덴데?' 기조로 압박했고, 슬프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게 사실이기에 탈락으로 이어졌다. 중소 IT기업 최종면접은 그닥 특이한 점은 없었으나 열 명이 넘는 면접관이 들어온 무시무시한 다대일 면접이었고, 교육재단의 최종면접에서는 재단 총장에 교수진까지 총 네 명이 들어와서 20분 동안 융단폭격같은 심층질문을 쏟아냈다.
결국 8개월 간의 백수생활 끝에 중소 IT기업과 교육재단으로부터 최종 합격 소식을 받았고, 지하철을 타면 환승 없이 22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중소 IT기업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여러 가지를 고려했으나, 2년 넘는 시간 동안 편도 30km가 넘는 거리를 통근해보니 가깝다는 점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편도 30km 거리의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인생이란! 어쨌든 이렇게 백수를 탈출해 다시 직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