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3년, 중학교 2학년 도덕 과목 방학 숙제로 "나의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내 자서전을 읽은 도덕 선생님이 학교 교지 담당이신 국어선생님께 나의 글을 보여드렸고, 내 자서전이 학교 교지에 실리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쓴 글에 있는 어떤 한 문장을 참 좋아해서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말하기도 했다. 마음에 두는 문장은 밑줄을 쳐두셨다. 아마 그 학교를 다닌 졸업생 중 교지를 유일하게 20년간 간직하고 있을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남겨져있는 나의 첫 글을 이곳에 기록해 본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글이기도 하다. 참고로 중2병 감성이 가득한 글이라는 것을 미리 적어둔다... 옮겨 쓰다 괜히 부끄러워 몇 번이고 옮겨쓰길 그만 두다 겨우 마쳤다. 참고로222 나는 지리교사가 아니다.
<후회 없는 선택, 아름다운 날들> 2학년 7반 000
1. 자서전집필의도
지금 내가 나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약간 묘해진다. 내가 이렇게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도덕 방학 과제'라는 공식적인 이유 아래, 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나'를 좀 더 빨리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또한 부모님 전기문을 쓰려 했지만 부모님께서 나의 숙제에 동참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60대라고 가정하고 쓰는 자서전인 만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자서전을 쓰기에 앞서 너무 기대된다!
2. 인물의 생애
(1) 나의 연보
이와중에 나이계산 틀렸다
(2) 요람에서 무덤까지
00년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부엌으로 기어 들어온 뱀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셨다. 그렇게 엄마의 꿈속에 뱀으로 나타난 나는 다음 해인 00년 0월 0일, 00에 있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섭섭하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숨과 헛기침만 내내 하셨고, 고모와 아빠는 엄마를 축하해 주셨다. 이름은 부드럽고 참되게 자라라는 뜻의 '00'으로 지어주셨다.
어린 시절 나는, 뽀글이 머리를 한 커다란 키티 인형과 작은 말을 신나게 타고 놀던 개구쟁이였다. 솜과 같은 까끌까끌한 물체가 없으면 잠도 못 자던 귀여운 아이이기도 했다. 또한 집 아래층에 있던 은행의 모든 업무를 마비시킬 정도로 노래를 못 부르던 음치이기도 했다. 그러던 00년 00이라는 곳에서 대구로 이사를 했을 무렵, 내가 7살이었을 때 남동생 00가 태어났고 난 언니가 나에게 그랬듯(확실하지 않음) 동생에게 그대로 복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쏟아부었던 어른들이 사랑을 남자인 00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고는, 어른들께서 안 보실 때마다 00를 괴롭혔던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그 행동은 곧 엄마께 들켜 혼났지만 동생과 티격태격하는 것도 커가면서도 여전했다. 그런 동생이 이젠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55살의,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으라면 아직까지는 4명인 것 같다.
우선 언니, 언니는 나와 4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언니가 하는 것을 따라 배우고 있다. 내가 보기에 언니와 같이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것은 하고 있다. 언니는 내 행동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다. 지금은 호호백발까지는 아니지만, 남들에게서 할머니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언니에게 받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부모님이시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아버지 덕분에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았고, 항상 내 일에 신경을 써주시는 어머니 덕에 학교나 학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건강하게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시며 90세월을 사시다가 작년에 조용히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말과 글로 표현 못 할 만큼 크다. 그러니 돌아가셨을 때의 아픔은 그 사랑만큼이나 컸다.
또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께서는 왜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유독 잘해주셨다. 그만큼 칭찬과 꾸중도 아끼지 않으셨다. 칭찬을 들을 때는 좋았지만 꾸중을 들을 때면 누구나 그렇듯 선생님이 미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꾸중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 같아 선생님께 감사하다.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정년퇴직을 하셨다고 하는데, 어디선가라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은 끝나고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의 생활이 중학교 생활보다 쉽지는 않았기에 힘들었지만, 그 순간에도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2009년, 나는 언니가 4학년으로 재학하고 있는 00대학교 사범대 지리교육과에 수석 입학했다. 어머니께서는 외국어에 관련된 과에 가라고 하셨지만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 이어가고 싶던 나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옛날부터 키워온 나의 작은 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결과, 나는 2012년 처음으로 교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첫 발령지는 나의 모교, 00여중이었다. 나의 첫 제자이자 후배들의 첫 수업을 들어가서 "안녕하세요 지리교사 000이라고 합니다." 그때의 말로 할 수 없을 만큼의 통쾌함이란!(중학 교과목에는 지리가 사회에 포함되어 있지만) 나는 내 일에 만족을 느끼고 나의 수업을 들어주는 학생들을 위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모자란 부분은 다시금 공부하여 학생들에게 나름대로의 훌륭한 수업을 보여주었다.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그러기를 38년, 이젠 61살이다.
38년 동안, 내가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갑자기 내 머릿속을 압박하는 질문이었다.
서랍을 열어 내가 교사 생활을 하며 받은 상장들과 월급 영수증을 꺼내었다. 월급 영수증은 모으려고 모은 것은 아니었다. 46년 전, 내가 15살일 때, 어머니가 나에게 종이 뭉텅이를 보여주셨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아버지께서 약 20년 동안 받아오신 월급의 영수증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빠가 우리 가정을 위해 열심히 수업을 해서 받아온 돈의 영수증이기 때문에 열심히 모으고 있단다. 아빠가 교사 생활을 마칠 때 선물로 드릴 거다."
23살, 내가 처음 월급을 받았을 때 그 영수증을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 쉽게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상장도 만들었다. 협회장은 아빠, 장관은 도덕선생님 ㅎㅎ
상장들, 도대체 무엇을 해서 상장을 받았나? 하는 마음에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소개하고 싶은 상은 <바른 스승 상>.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진정으로 바른 스승이었을까? 많고 많은 선생님들 중에 내가 바른 스승으로 뽑히다니. 그 상을 받을 당시에 나의 콧대는 얼마나 높아졌을까, 아니면 그 바른 스승이라는 사명감이 얼마나 나의 어깨를 눌러왔을까 하는 옛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국지리 연구 공헌 상>. 이 상은 지리교사인 내가 지리교사모임에서 받은 상이다. 내가 지리를 사랑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지리연구에 그리 크게 공헌한 바가 없는데 이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다.
내가 처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먹었던 마음을 가진 젊은 선생님들이 학교로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첫 마음을 그들에게 빼앗겼다거나, 그들에 뒤쳐질만큼 그 소중한 생각이 떨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그대로이다. 바뀐 건 외양뿐이다. 마음만은 38년 전 그대로이다.
나는 교단에서 물러났으나 그 마음만은 언제나 한결같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 00여중 개교 기념 100주년이 되는 날, 나는 강당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이 말하길 '얼마나 따분한가. 멈춰 서는 것, 끝내는 것, 닳지 않고 녹스는 것, 사용하지 않아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쓰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날, 목도리가 필요 없는 듯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따분하고 지겹게 느껴지겠지요? 그 따분하고 지겨운 말을 쓰고 이렇게 아무 반응 없는 여러분 앞에서 말하는 저는 어떠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이 말을 쓰고 지금 말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여러분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비 오는 날의 우산처럼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내일이면 결혼 33주년이 되는 날이다. 항상 내가 교사로서의 자부심을 학교에 나타내느라 가정에서의 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은 나타내지 못한 것 같아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이런 엄마를 항상 믿어주어 고맙기도 하다. 이젠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지만,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아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함께 할 동반자, 나의 남편도 나에게 불평하지 않고 나를 믿어 주어 정말 고맙다. 이젠 교단에서 물러났으니 가정에 충실한 어머니이지 아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교단에 대한 애정을 버린 것은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나의 직업에 대한 사랑이 고이 간직해 있으며, 언제라도 그 사랑을 꺼내 볼 생각이 있다.
3. 미래에 대한 희망 및 자서전 후기
자서전을 쓰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던 내가 있었구나, 몇 살 때는 무엇을 했고 이런 일이 있었구나 등등의 이야기..
내가 태어났을 때 분위기가 침울했다니, 이런 얘기를 엄마께 들을 때 좀 섭섭했다. 하지만 고모와 아빠는 나의 탄생을 축하해 주셨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 미래를 가상으로 써보는 것도 너무 재미있었다. 00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라니! 생각만 해도 좋았다. 아직은 좀 이르지만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단에 선 지 38년이 되는 날,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 100주년을 맞아 내가 강당에 서서 할 말을 쓰면서(말에 쓰여있는 것처럼 뻔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말을 쓰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나 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솟았다. 또, 내일이면 결혼 33주년이라는 말을 쓰며 내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웃음이 나왔다.
정말 6년 후에는 00대 지리교육과에, 47년 후에는 00여중 강당에 서서 위에 적힌 내용과 같은 이야기를 나의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처음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어떤 양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모두 끝내고 보니 무척 뿌듯해졌다. 마지막으로 도덕 선생님, 이렇게 뜻깊은 숙제를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년 후 이 글을 다시 읽은 나의 소감>
1. 글에 쉼표와 괄호를 많이 쓰는 건 20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버릇이었나 보다. 나는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청소년기 때와 20대 초반의 나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쉽다. 옮겨 쓰면서도 몇 번이고 나 왜 저래.. 싶은 글이었지만 이조차도 나의 역사이기에.. 남아있음에 감사하다!
2.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건강하게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으시며 90세월을 사시다가 작년에 조용히 돌아가신"이다. 근데 엄마 100세 시대가 될 줄 몰랐지... 오래오래 살아줘요
3. 아빠 덕에 그때는 나도 언니도 지리 선생님을 할 줄 알았다. 어쩌다 돌고 돌아 나는 지금 특수학교에 ...!
4.. 그리고 미니멀리즘을 꿈꾸는 내가 월급 영수증을 모은다니... 카드 영수증도 안 받거늘! 나이스에서 확인할 수 있단다! 종이아까우니 인쇄하지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