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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푸른 황금’, 수소경제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20세기 산업을 지배한 것은 석유와 석탄 같은 화석연료였다. 값싼 에너지는 인류를 대량 생산·소비의 궤도에 올려놓았고, 자동차·조선·철강·석유화학 같은 중후장대 산업은 그 위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대기오염과 기후위기, 에너지 안보의 불확실성은 이 ‘성장의 그늘’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에너지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오사카에서 열린 수소 관련 국제회의에 글로벌 기업과 정부 대표들이 모여 ‘다음 30년’을 논할 때, 메시지는 분명했다. 수소는 더 이상 R&D 쇼케이스가 아니라 정책·투자·표준이 실제로 움직이는 ‘현업의 의제’라는 사실이다. 항공에서는 2030년대 중반 상용화를 목표로 수소 동력기가 검토되고, 자동차·철강·조선은 탄소의존 공정을 바꾸기 위한 실험을 넘어 대규모 전환의 실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수소경제를 기술이 아닌 글로벌 비즈니스의 언어로 해석하고자 한다. 왜 기업들이 수소에 투자하는지, 생산방식별 경쟁 구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 기업이 어디에서 기회를 찾고 어떤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수소경제를 비즈니스로 읽는 네 가지 프레임


왜 지금, 왜 수소인가: 기술 트렌드를 넘어 산업구조 전환

수소경제는 단순히 연료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공장의 공정, 물류 네트워크, 전력계통, 도시 인프라까지 설계 철학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하는 체계의 전환이다. 이러한 전환을 밀어붙이는 힘은 세 갈래다.


첫째, ESG와 규제가 게임의 규칙을 바꿨다. 탄소가격·배출권·CBAM이 적용되면 “친환경이면 좋다”가 아니라 “친환경이 아니면 수출과 조달이 막힌다”로 해석된다.


둘째, 에너지 안보다. 지정학 리스크로 공급망은 ‘멀고 싸게’에서 ‘가깝고 안정적으로’로 재설계되고, 재생에너지 잉여 전기를 수소로 저장해 이동시키는 모델이 전력계통과 연료시장을 잇는 버퍼로 기능한다.


셋째, 신성장축의 재편이다. 배터리가 경량 승용차에서 앞서는 동안, 장거리·고하중의 트럭·선박·항공 영역은 연료전지와 e-연료가 해법을 제시하며, 이 구간에서 수소는 대체재가 아니라 사실상 필수재로 부상하고 있다.


생산방식 경쟁: 그레이, 블루, 그린 수소의 다층 구도

수소의 친환경성과 경제성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좌우된다.


그레이수소: 천연가스 개질 기반. 가장 싸고 성숙하지만 CO₂ 배출이 크다. 당장 필요한 산업용 수소를 책임지지만, 규제가 강화될수록 ‘탄소 리스크 가격’이 붙는다.

블루수소: 그레이 공정에 CCS(탄소포집·저장)를 결합. 과도기 해법으로 주목되지만, 포집·수송·저장 인프라 비용과 누출 가능성, 지역 수용성 이슈가 수익성을 흔든다.

그린수소: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 넷제로의 정석이지만 아직은 생산비용이 상당히 높다. 전력 단가 하락, 전해조 스케일업, 규제완화가 동반되어야 본격적인 확산이 가능하다.

부생수소: 정유·제철 부산가스 활용. 단기 경제성이 좋고 현장 적용이 빠르지만, 원천 공정이 화석 연료라는 태생적 한계와 공급량 제약을 안고 있다.

바이오수소: 유기물 분해·광촉매·미생물 경로 등 차세대 기술. 친환경성과 분산형 생산의 잠재력이 크지만, 대량 상용화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따라서, 하나가 다른 모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 포트폴리오가 정답이다. 단기엔 그레이/부생+효율·감축, 중기엔 블루+CCS 체계·정책 연동, 장기엔 그린의 표준화·규모의 경제가 승부처가 될 것이다.


인프라와 표준: 수전해, 저장, 운송이 수익성을 결정한다

그린수소의 경제성은 전력·입지에서 결정된다. 전체 원가의 다수를 차지하는 전력비를 낮추려면 일사량·풍속 같은 자연조건뿐만 아니라 토지 이용성, 물 확보, 송전선로 접근성까지 종합해 최적 부지를 정해야 한다. 전력 단가가 조금만 내려도 수소 단가가 크게 개선된다.


저장·운송 형태 선정도 비용을 좌우한다. 기체 파이프라인은 초기 인프라가 크고, 액화는 초저온 유지 비용이 든다. 암모니아 전환은 해상 장거리 운송에 유리하지만 최종 단계의 역변환 비용이 붙는다. LOHC는 기존 액체 물류망을 활용할 수 있으나 흡·탈수소 공정의 에너지 투입을 정밀 관리해야 한다. 현재 장거리 해상은 암모니아가 가장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그린’은 선언이 아니라 증명이어야 한다. 표준화된 탄소집약도 산정과 GO(Guarantee of Origin) 등 보증서 체계를 갖추고, 국가 간 상호인정을 확보해야만 프리미엄이 형성된다. 회계상의 분류를 넘어, 물류 흐름과 데이터로 추적 가능한 ‘진짜 녹색’만이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수요처 전환: Hard-to-Abate 섹터가 초기 시장을 열어젖힌다

수소 전환의 파급력은 수요 산업에서 가장 선명하다. 모빌리티 분야에서는 승용차는 배터리가 앞서지만, 대형 상용차·건설기계·장거리 버스처럼 무겁고 오래 달리는 영역은 연료전지가 총소유비용(TCO)을 더 낮출 여지가 크다.


조선업은 암모니아·메탄올·수소 추진이 시험 운항 단계로 들어서며, 연료 선택에서 엔진·탱크·안전 규격까지 전 생태계가 동시 성장하는 국면을 맞고 있다. 그리고 철강에서는 고로를 수소환원제철(H₂-DRI)로 전환하면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지만, 막대한 설비투자와 함께 전력·수소의 장기 조달 계약이 필수다.


정유·화학은 그린암모니아, e-메탄올, SAF(지속가능 항공연료) 등 저탄소 제품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새로운 수요를 연다. 전력·데이터센터 영역에서는 피크 대응, 비상전원, 마이크로그리드에서 연료전지의 활용이 확대되어 계통 안정성과 분산형 전원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한국의 기회: 제조 강국 x 프로젝트 개발국의 하이브리드 전략

한국은 전해조와 연료전지, 배관·밸브·압축·센서에 이르는 장비·부품 역량을 갖추는 동시에 조선·철강·자동차라는 굵직한 수요처를 보유한 드문 국가다. 상용차 연료전지와 수소충전 인프라의 초기 구축 경험, 암모니아 추진선과 수소환원제철 실증 로드맵, 산업단지형 부생수소 허브 등은 해외 투자자와 파트너에게 ‘눈에 보이는’ 레퍼런스로 작동한다.


자원은 해외가 강하고, 시스템 통합·엔지니어링·제조·운영은 한국이 강한 만큼, 자원국(중동·호주·아프리카)과 수요국(한국·일본·EU)을 잇는 삼각 협력 구조에서 "장기 오프테이크(Offtake) + 프로젝트 파이낸싱(PF) + 국가 보증"을 묶어내는 ‘개발형 제조’ 접근이 현실적 해법이다.


다만 환율, 전력단가, 규제·인허가, 사회수용성은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 보증과 공공 조달, 그리고 세이프가드형 정책(차액정산·세액공제)이 마중물이 되어야 민간 자본과 실수요가 따라붙는다.


수소경제는 ‘기술’이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다


석유가 20세기의 검은 황금이었다면, 수소는 21세기의 푸른 황금이 될 잠재력을 지닌다. 따라서 한국 기업에게 수소경제는 리스크이자 기회다. 비용과 인프라, 규제라는 산을 넘어야 하지만, 일찍 표준과 레퍼런스를 확보한 플레이어는 탄소 규제의 시대에 가격·신뢰·접근성에서 우위를 갖게 된다.


산업의 역사는 언제나 에너지의 역사였다. 바퀴를 돌린 것은 증기였고, 내연기관을 움직인 것은 석유였다. 다음 장의 페이지를 넘길 힘은 수소가 쥐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다’가 아니라 ‘실행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는 수소를 둘러싼 장기 계약과 인프라 배치를 통하여 미래의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한국의 답은 명확하다. 제조 강국의 손으로, 프로젝트 개발국의 머리로, 글로벌 파트너십의 어깨로 푸른 황금을 캐내는 일. 그렇게 할 때, 수소경제는 환경의 과제가 아니라 성장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언어로 쓰인 미래의 문장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더 깨끗한 분자로, 더 강한 산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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