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스페이스오디티 마케터)
에디터들의 글을 즐겨 읽는다. 정보의 범람 속에 선별된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 좋고, 목차만 꼼꼼히 들여다봐도 요즘 트렌드를 파악하기 좋기 때문이다. 한 편의 글에서 감동을 얻을 때도 있고, 그냥 재미있어서 보게 된다. 나는 에디터라기보다는 취미로 글을 쓰는 마케터로서, 그들의 콘텐츠를 좋아하고 소비하는 ‘독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직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대에 ‘이야기'를 다루는 에디터와 마케터는 일에 있어서도 통하는 구석이 많을 거라 예상한다.
'엮고, 모으는 일'은 편집자뿐만 아니라 마케터의 역할이기도 하다.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무언가를 만들고,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은 에디팅뿐만 아니라 마케팅에도 해당된다.
나에게 좋은 마케팅이란, 어떤 것을 포장하고,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있게 권장하고 이야기할만한 사건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케터에게 ‘일정한 방침 아래 재료를 모으는 것'은 전략에 따른 리서치 단계나 다름없고, ‘여러 재료를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자신 있게 권장할만한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들고, 운영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광고가 불특정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반복해서 던지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다. 경험을 ‘방해'하면서 메시지를 불편하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는 광고가 아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브랜드는 브랜디드 콘텐츠를 만들고, 브랜드 저널리즘을 통해 인사이트를 전달한다. 이런 시대에 글쓰기는 어찌 보면 마케터의 숙명과 같다. 다양한 콘텐츠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고, 글쓰기에는 자연스럽게 에디팅이 따라붙는다.
스페이스오디티는 《오디티 매거진》을 통해 한 달에 두 번, 요원들이 직접 쓴 글을 발행한다. 스페이스오디티의 인사이트, 조직 문화, 함께 협업하는 크리에이터들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오디티 매거진》은 회사에서의 본업은 따로 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요원들이 ‘서클' 형태로 모여 글 한 편의 작성자이자 조언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매거진 글을 준비하고, 작성하고 발행하는 과정에는 에디팅 능력이 요구된다.
1) 주제 정하기: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주제를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한다.
2) 구조 짜기: 흩어져 있는 정보를 분류해 큼직한 구조를 짠다. 이 구조가 글 한 편의 블루 프린트가 된다.
3) 작성하기: 작성자가 초안에 맞춰 글을 구체화하고 결론을 내린다.
4) 리뷰하기: 글이 완성되면 조언자가 불필요하거나 반복되는 부분을 드러내고, 매끄럽지 않은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준다. (조언 및 교정, 교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해보는 것은 프로젝트의 가장 본질이 되는 마케팅 메시지나 콘셉트를 정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정보를 조합하고 정리하는 능력은 마케팅을 할 때도 기획을 할 때도 도움이 된다. 위 네 가지 단계는 ‘에디팅 스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마케터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에디터는 여러 곳에서 얻은 정보를 주제에 따라 선택적으로 소개한다. ‘편집'이란 단어에서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듯이, 에디팅은 결국 정보를 선별(큐레이션)하는 일이다.
스페이스오디티의 뉴스레터인 ‘오디티 스테이션'은 스페이스오디티를 좋아해 주는 분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꾸준히 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시작되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구독자들의 메일함으로 음악과 트렌드, 스페이스오디티의 최근 소식을 배달한다. 매주 나가는 추천 음악은 특정 주제에 맞게 스페이스오디티 요원들이 직접 고르거나, 사무실에 흘러나왔던 음악으로 선별한다. 트렌드는 일주일간 스페이스오디티 슬랙 채널에서 공유된 소식 중 선택해 소개한다. 음악, 트렌드 소식과 함께 그 주의 스페이스오디티 소식을 자연스럽게 알린다.
1년 넘게 꾸준히 뉴스레터를 운영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잘 읽고 있다고 답장을 보내 주거나 오디티 스테이션 팬임을 자처하는 분들도 생겼다. 구독자들이 오디티 스테이션을 ‘스팸'으로 느끼지 않고, 반겨주는 이유에는 글 뒤에 사람이 느껴진다는 점과 스페이스오디티의 큐레이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시간을 들여 큐레이션한 콘텐츠는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느껴진다. 잠식당할 만큼 선택지가 무수한 상황에 나의 기호에 맞게 선택지를 좁혀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가치가 된다. 현재 오디티 스테이션은 약 5,000명의 구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이자 스페이스오디티의 소식을 알리기 좋은 마케팅 채널이 되어주고 있다.
글을 쓸 때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할 때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에서의 에디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보와 취향 등 다양한 소스를 하나의 기획 아래 한 데로 묶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러스트레이터와 드로잉 작가의 작품을 조망하는 디뮤지엄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전시와의 사운드 컬래버레이션을 예로 들 수 있다. 스페이스오디티는 디뮤지엄이 제안한 작가 5명 공간의 음악을 온라인 음악 유통 플랫폼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선곡했다. 드로잉 작가들이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작품을 올리며 작가 스스로의 브랜딩과 외부 협업의 기회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면, 같은 개념으로 뮤지션들에게는 사운드 클라우드가 그런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운드 클라우드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선곡한 건 전시의 기획 의도는 물론 현재의 트렌드, 디뮤지엄과 관객의 특징, 전시 작품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전시장에 선곡된 사운드 클라우드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전시 참여 아티스트인 람한 작가의 작품으로 한정판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전시장에서의 경험을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디뮤지엄의 뮤지엄샵과 29CM에서 유통되며 사운드 컬래버레이션 기획을 한 번 더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케팅은 소통이고, 브랜딩은 관계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명확해야 하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뢰 형성이 중요하다. 메시지를 뾰족하게 만들고, 일관된 철학에 따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읽고 여러 정보와 취향을 조합하는 능력,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다듬는 에디팅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일의 기획, 전략, 받아들일 사람의 정서까지 고려해 정보를 선별하고 편집하는 일에는 자연스레 누군가의 가치관과 기준이 적용한다. 아직까지 그 선택을 기계가 하긴 힘들어 보인다. 숫자와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마케팅에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은 그 수치 하나하나 뒤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전할 때 에디팅을 통해 사람 대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다.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건 빼는 것.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것. 에디터의 일이란 더 넓은 개념에서는 마케터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