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 저자)
작가로 데뷔하고 활동한 기간에 비하면 꽤 많은 편집자를 경험한 편이다. 비교적 다작을 했고, 또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냈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 세어 보니 단독 단행본 작업을 같이 한 편집자만 열 명이 넘는다.
무슨 계획이나 전략이 있어서 많은 편집자와 작업한 것은 아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공모전 형식의 문학상을 네 개 받으면서 그 문학상을 주최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한 권씩 내게 됐고, 편집자 네 사람을 만났다. 작가 생활 초기에는 여러 출판사에 투고도 했고, 그렇게 알게 된 편집자도 있다. 내 글이 좋다며 자기 출판사에서 책을 내보지 않겠느냐는 편집자도 있었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와 계약을 맺었다. 출판계는 이직이 무척 잦다. 어느 편집자와 작업하고 싶어서 그가 속한 출판사와 계약을 했더니 원고를 넘길 때쯤 그이는 퇴사하고 다른 편집자가 내 원고를 담당하게 된 일도 있다. 그렇게 여러 편집자와 인연을 맺었다.
그 편집자들 중에는 나와 착착 호흡이 맞는 이도 있었고, 좋은 사람인 거 같은데 나와는 손발이 잘 안 맞는 경우도 있었고, 두 번 다시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두고 내가 그에 대해 유능한 편집자다 아니다 말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작가에게는 편집자의 한 단면만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책 한 권으로 편집자 한 사람을 만날 뿐이지만, 그 편집자는 다른 저자를 수십 명 관리하는 중이다.
브런치팀에서는 내가 경험한 에디터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원고 청탁서를 보내오면서, 자신들은 에디터를 ‘기존에 있는 무언가를 잘 선별해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출판 노동자 중에는 트렌드를 잘 파악해 단행본을 기획하는 부서의 편집자들, 특히 경영이나 인문, 자기계발 분야의 편집자들이 이 정의에 보다 잘 들어맞는 것 같다. 한국 소설가와 국내 문학 편집자의 관계는 좀 더 특수하다.
국내 문학 편집자는 에디터보다는 프로듀서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국내 문학 편집자의 그런 프로듀싱 업무 역시 브런치팀이 재정의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큰 틀의 에디터십에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내 관점에서 한국 소설가와 문학 편집자의 관계,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편집자에 대해 적어 보련다. 브런치팀이 에디터십을 발휘해 자신들의 기획 안에서 이 원고를 잘 배치하고 멋진 제목을 붙여 적절한 맥락과 의미를 창조해 주리라 믿으면서.
단행본 저술업자로서 나는 담당 편집자와 대개 출간 계약을 할 때 만나 인사를 나눈다. 그 자리에서 대강의 원고 구상을 설명하는데, 솔직히 이 단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구상이 그대로 작품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 없는 아이디어는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다. 이는 문학의 특성 탓이기도 하다. 작품을 다 쓰기 전까지, 작가는 결말은커녕 자기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나 교양서, 자기계발서 같은 경우에는 저자와 편집자가 초기 단계부터 훨씬 더 긴밀히 논의한다고 들었다.
이후 초고를 쓰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고 여긴다. 초고를 쓸 때에도 편집자와 간혹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내용은 ‘제가 이쯤에서 이렇게 헤매고 있습니다’와 ‘기운 내세요’, 가끔은 ‘그 원고 혹시 언제까지 마감 가능하신가요’ 정도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글은 내가 쓰고, 책은 편집자와 함께 만든다고.
초고를 보내고 나서 본격적으로 편집자와 논의를 시작한다. 먼저 원고를 쓰면서 의도한 나의 목표가 있다. 나는 편집자가 그 비전을 제대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 의도는 어떤 독자층을 만나고 싶은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글의 어떤 부분이 어느 정도로 재미있거나 불편하거나 무겁거나 가볍거나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일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반면 저자인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원고의 결점과 잠재력이 있다. 어떤 부분을 고치고 보완해야 할지, 어떤 부분을 더 강화해야 할지, 어떤 외피를 둘러야 할지, A그룹 독자들과 어떤 맥락으로 만나야 할지, B그룹 독자들과는 어떤 맥락으로 만나야 할지 등등에 대해 나는 편집자가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즉 내가 원하는 바는 이러하다. 편집자가 큰 틀에서 나와 같은 산을 바라보면서, 그 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함께 찾고 고민하는 것.
그런데 가끔은 아예 나와는 다른 산을 바라보는 편집자도 있다. 이 역시 문학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 다른 경우다. 사람마다 문학관이 다르고, 때로 이는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는 문제가 된다. 이 경우에는 그 두 사람이 같이 작업하지 않는 게 옳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만 해도 몇 번을 읽어도 『위대한 개츠비』가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내가 『위대한 개츠비』의 편집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도움이 안 될 거다.
불행히도 한국 문단문학계에서는 이렇게 서로 뜻이 안 맞는 소설가와 편집자가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이 왕왕 빚어진다. 편집자가 소설가를 고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디터십이 강한 해외 출판계에서는 편집자가 작가 에이전시로부터 원고를 받아 검토하고 출간 계약을 맺는다. 편집자가 직접 발탁한 작가이므로 둘의 문학적 취향은 상당히 겹칠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 문단문학은 주로 공모전으로 신인 작가를 선발하는데, 이때 선발 주체는 원로, 중진 소설가나 평론가들로 이뤄지는 심사위원들이다. 그들이 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을 결정하고, 정작 그 원고로 책을 만드는 일은 작품 심사과정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은 편집자가 한다. 가끔은 편집자가 ‘이게 왜 뽑혔지? 이해를 못하겠네’ 하고 어이없어하면서 속마음을 숨긴 채 작가와 작업해야 하는 일도 벌어진다. 작가에게도 편집자에게도 불행한 관계다.
그런 경험을 겪은 작가들은 편집자라는 직업 전반을 불신한다. ‘(나를 뽑아준) 소설가와 평론가들은 문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데 편집자들은 수준이 떨어진다’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 출판계는 전반적으로 저자를 떠받드는 분위기라, 작가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편집자들과 수평적인 소통을 하기 어렵게 된다. 젊은 편집자도 ‘건방지다, 버릇없다’는 야단을 한두 번 맞고 나면 소설가에게 의견을 내는 일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에디터십은 언감생심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실력 있고 사려 깊은 편집자들을 작가 생활 초기에 만나면서 편집자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일찍 깨쳤다. 여러 편집자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한 사람만 들자면 민음사의 박혜진 차장에게 특히 감사하다. 그녀와는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 논픽션 『당선, 합격, 계급』, 연작소설 『산 자들』을 함께 만들었다.
그녀와 일하며 내가 얻는 것, 배우는 점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렵다. 그런데 그중 으뜸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그녀가 알려준다는 점이다. “당신은 한국 문학에서 이런 계보에 속해 있으며, 이번에 올라야 할 산은 이 산입니다”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최근에 『산 자들』을 쓸 때 박 편집자는 내게 “이 소설이 우리 시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원미동 사람들』 같은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했고, 나는 단단히 기합이 걸렸다.
막연히 ‘멋진 소설을 쓰고 싶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도 되고 싶다’는 마음만 품고 있던 나는 그녀와 작업하면서 점점 내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것은 달리 말해 내가 어떤 소설가인지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가 한국 문학의 현재를 깊이 이해하고, 한국 소설의 미래를 긴 시간 고민하고, 소설가로서 나의 개성과 장점을 잘 파악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지금의 장강명이라는 소설가 자체를 얼마간 박혜진 편집자가 프로듀싱한 작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나 외에도 다른 많은 소설가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걸로 안다. 대표적으로는 투고 원고인 『82년생 김지영』을 발견하고 책으로 펴낸 이가 박 편집자다. 나는 조남주 작가도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소설가 아닐까 속으로 혼자 생각한다. 5만 부 이상 팔리고 신동엽문학상을 받은 『딸에 대하여』 역시 박 차장이 김혜진 작가에게 경장편소설을 제안해 시작된 소설이라고 들었다.
다른 두 분께 실례가 되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어떤 차원에서는 지금의 장강명, 조남주, 김혜진을 민음사 한국문학 편집부가 프로듀싱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세 사람은 민음사의 경장편 시리즈로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데뷔는 했고 가능성은 보이지만 자리를 완전히 잡지는 못한 젊은 작가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으로 단행본을 낼 기회를 준다’는 취지로 민음사 한국문학 편집부가 기획한 시리즈였다.
박혜진 편집자를 비롯해 내가 신뢰하는 몇몇 편집자들이 있다. 그들의 생각을 내가 무조건 따른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내 생각을 그들이 무조건 따라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 머리말에서 자기 편집자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고 썼다. 그 말을 그대로 읊는 소설가들도 여럿 봤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소설가가 그런 말을 하면 편집자는 부담을 느낀다. 파트너로서,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편집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파트너로서 편집자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으려 한다.
그런데 파트너니까 의견이 서로 갈릴 수도 있다. 사실 의견이 달라야 발전한다. 매번 두 사람의 견해가 같으면 애초에 의논할 필요 자체가 없다. 그러니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책에 대해 나는 내 의견을, 편집자는 편집자의 의견을 활발히 내고,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고 답하고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와 편집자의 이상적인 관계다.
“왜 이 표지 시안들을 골랐느냐”고 물으면 어떤 편집자는 디자인의 의도나 세세한 디테일, 본문과의 적합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다. 박혜진 차장이 그렇다. 그런 설명을 들으며 나는 표지에 대해서도, 내 글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갈 책에 대해서도 배운다. 그런 설명은 실질적으로도 책 홍보에 도움이 된다. 나중에 인터뷰를 할 때 표지에 대해 묻는 기자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질문을 몇 번을 던져도 답을 피하다가 “글쎄요, 디자이너가 알아서 어련히 잘 고르지 않았을까요”라고 반응하는 편집자도 있었다.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업무 때문에 바빴을지도 모른다. 특히 규모가 작은 출판사에서는 편집자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내가 그(녀)와 다시 작업할 것 같지는 않다. 딱히 꽁해져서가 아니라, 나와 잘 맞는 좋은 편집자들을 이미 여러 명 알기 때문이다. 타인과 신뢰 관계를 쌓는 일은 도전이고 모험이고 도박이다. 지금은 내가 그런 모험을 새로 벌이기보다는 이미 쌓아놓은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결실을 맺을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만든 책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변덕스러운 시장 반응을 놓고 나중에 내가 옳았니 네가 옳았니 따지는 게 의미 있을까? 우리는 성공하면 함께 성공하고 실패하면 함께 실패한다. 다만 그렇게 성공하거나 실패하기 전에 활발히 두 머리를 짜내어 후회 없이 좋은 책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한다. 한쪽에서는 이런 관계를 맺는 힘을 에디터십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 다른 쪽에서는 파트너십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