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런치스토리팀 Aug 19. 2019

공간을 채우는 기술

장수연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담당자)

지면과 공간의 에디팅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에디터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보그 코리아》가 한국에 론칭했을 때다. 왜 지면에 등장하는 화려한 명품이나 유명한 사람이 아닌, 구석에 조그맣게 새겨진 에디터라는 단어에 빠져들었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프랑스 라이선스 매거진의 에디터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에디터의 업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서치, 기획, 섭외, 촬영, 원고, 디자인 심지어 마지막 인쇄까지 모든 것을 관여해야 한다. 감으로 트렌드를 파악하는 센스도 필수다. 특종을 찾고 팩트 위주의 기사를 쓰는 신문 기자와는 다르며 글에만 집중하는 작가와도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는 세심함과 현장에서 제대로 진행이 안 되면 그동안 들인 모든 공이 물거품이 돼버리는 긴장감, 매달 찾아오는 마감의 압박까지 전체적으로 만만치 않다. 


에너지 드링크와 커피를 물처럼 마시면서, 24시간 해장국집의 단골이 되면서, 맥모닝을 먹고 퇴근하면서, 그렇게 나의 에디터로서의 체력은 단련되어 갔다. 패션지, 남성지, 라이프 스타일 잡지를 거치다 F&B를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에 5년간 몸담았던 것을 계기로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로 이직했다. 처음에는 이 공간과 나의 직업적 특성의 적합 여부에 대한 의문이 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았다. 지면과 공간의 ‘에디팅’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공간을 채우는 기술


쿠킹 라이브러리는 쿠킹에 대한 모든 것을 집대성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복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곳이 단순히 라이브러리, 즉 도서관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층은 간단한 요리와 음료를 먹을 수 있는 델리, 2층은 만여 권이 넘는 쿡북을 소장한 도서관, 3층은 실제로 요리할 수 있는 주방, 4층은 오직 한 팀만 예약을 받는 프라이빗 레스토랑이 연결되어 있다. 


처음엔 이 공간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현실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가 막막했다. 콘셉트와 공간의 기능은 물론 층별로 운영 업체마저 다 달랐다. 평면에 3차원을 표현하고 싶었던 피카소처럼 나는 지면을 기획하던 습관을 공간으로 끌어오기 시작했다. 공간이 기능별로 나뉘어 있어 다양하지만 그렇기에 따로 논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푸드 테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그것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잡지 구성의 고전적인 클리셰 중 하나다. 기사는 물론 그 주제로 한 권을 채우기도 한다. 쿠킹 라이브러리의 푸드 테마는 기본에 충실하자는 콘셉트와 함께 우리 식문화에 유의미한 식재료를 선정하는 것에 주목했다. 익숙하지만 그래서 더 잘 몰랐던 쌀을 시작으로 꿀, 간장, 파스타, 맥주 그리고 샤퀴테리까지. 기본과 트렌드를 넘나들며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면과 공간이 같을 순 없겠지만, 한 사람이 무언가를 인지하고 경험하고 그 기억을 저장하는 순서는 비슷하기에 공간을 지면처럼 해체해서 프로세스화했다. 우선 1층 델리는 인트로의 개념이다. 입구에 들어오면 주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엔트런스 월을 설치했다. 마치 잡지처럼 내용을 보기 쉽게 일러스트, 인포그래픽으로 구성했다. 테이스팅 존도 설치했다. 식재료인 만큼 직접 먹어볼 수 있는 경험 또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쿠킹 라이브러리 특성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평면과 공간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지면이나 인터넷에서는 눈으로 본 정보를 바로 체험할 수 없지만 공간은 눈으로 봄과 동시에 직접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1만 2천여 권의 쿡북이 소장되어 있는 2층 열람실에서는 주제와 연관된 작은 전시가 펼쳐진다. 관련 책자도 사서가 선정해 비치하기 때문에 전문적이다. 전시를 보고 관련 도서를 읽거나 또는 그 반대로 연결되는 동선도 쿠킹 라이브러리만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3층 주방과 4층 다이닝 룸에서는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클래스와 이벤트를 진행한다. 주로 3층은 고객이 실제로 요리를 해볼 수 있는 클래스 위주로, 4층은 조금 더 심화된 과정을 소수 정예로 구성한다.


한 사람이 1층부터 4층까지 경험하게 되면 그 주제에 대해서 초급부터 실습, 고급 과정까지 이어지는 단계적인 체험 프로그램인 셈이다. 주제에 따라 행사의 구성과 기획, 셰프나 연사가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도 공간의 통일성과 더불어 푸드 테마의 기대 효과이기도 하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리 여행이 낫다는 말이 있다. 쿠킹 라이브러리는 책 속에 갇혀 있는 내용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공간에 구현시킨 특별한 장소다. 지면을 꾸리던 에디터에서 공간 기획자가 된 나 자신의 변화가 곧 사회의 변화를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에 지친 사람들은 차츰 다시 오프라인 커뮤니티로 모이기 시작했다. 공간은 이제 사람이 모이는 곳이자 스토리가 있는 곳, 정보의 큐레이팅이 필요한 곳이 되었다. 발품을 팔아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고, 자신만의 아지트를 찾는 사람들이 확실히 늘었다. 공간을 구성하는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쿠킹 라이브러리가 '쿠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하나의 정거장이 되길 꿈꾸며 오늘도 다양한 기획을 시도 중이다.






이전 03화 에디터는 백 번 듣고 한 번 말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