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주 (저널리스트, 前 《에스콰이어》 편집장)
"커버로 라이언은 어떨까요?!" 처음엔 농담이었다. 듣고 보니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말하다 보니 진담이 돼버렸다. 국민 이모티콘 라이언을 《에스콰이어》의 커버 인물로 다뤄보자는 발상은 편집장과 패션 에디터들의 흔한 점심 수다 자리에서 튀어나왔다. 분명히 아재 편집장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젊은 패션 에디터들의 생각이었다.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1995년 창간 이래 인간이 아닌 존재를 커버로 다뤄본 역사가 없었다. 라이언은 파격이었다. 처음 라이언을 떠올리고 실제로 라이언과 《에스콰이어》의 콜라보가 실현되는 데까지 반년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라이언은 2019년 3월호 《에스콰이어》의 커버로 등장했다.
처음부터 사람이 아닌 존재를 커버로 다뤄보자는 전략에서 시작했던 콘텐츠는 아니었다. 라이언을 커버로 다루면 화제를 모으겠다며 획책했던 콘텐츠도 아니었다. 라이언이 커버인 《에스콰이어》를 독자들이 사재기하지 않을까 싶은 목적에서 출발한 콘텐츠도 아니었다. 라이언도 여느 콘텐츠들처럼 수많은 씨앗 가운데 하나였다. 콘텐츠의 씨앗은 실로 무수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콘텐츠의 씨앗을 만난다. 이 중 무엇이 콘텐츠로 피어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연과 선택과 현실과 의지가 혼탁하게 뒤섞인 복잡계의 영역이다.
당초 라이언 커버는 푸념에서 비롯됐다. 커버로 다루고 싶은 참신한 인물이 도무지 없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라이언을 커버로 하는 게 낫겠어요." 우연이었다. "정말 그래 볼까? 안 될 건 또 뭐 있어?! 내가 한번 카카오 측에 물어볼게." 선택이었다. "주변에서 자꾸 라이언을 커버로 다루면 매거진 판매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 수치로 제시해보라고 하네." 현실이었다. "라이언을 《에스콰이어》 커버로 만든다는 목표 하나에만 집중합시다. 다른 건 과감하게 무시합니다." 의지였다.
'에디터'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의 인쇄 매체 제작에 참여하는 직업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해서 종이 매체에 활자나 사진을 배열하는 편집자를 뜻한다. 협의의 에디터다. 솔직히 오늘날 에디터의 역할은 이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그렇다고 광의의 에디터란 무엇이라고 단순 정의하는 건 섣부른 일이다. 에디터는 스스로 직무 범위를 확대하면서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는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에디터십'이라고 불리는 에디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종이 매체가 대세이던 시절 에디터는 사각형의 한정된 공간 안에서 어떤 콘텐츠를 담아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역할을 했다. 플랫폼 안에 어떤 콘텐츠를 담을지 취사선택하는 행위가 바로 에디터십이다. 콘텐츠가 물이라면 플랫폼은 그릇이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콘텐츠가 없는 플랫폼은 그냥 빈 그릇일 뿐이다. 콘텐츠는 플랫폼에 담기지 않으면 그저 엎질러진 물에 불과하다. 결국 어떤 그릇에 어떤 물을 담을지가 중요해진다. 에디터십을 지닌 에디터의 역할이다.
그래서 에디터가 종이 책이나 종이 잡지를 만드는 단편적인 직업으로 비쳤던 건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독자들은 정신적으로는 종이라는 플랫폼에 담긴 무정형의 콘텐츠를 읽고 보면서도 물질적으로는 종이 책이나 종이 잡지를 본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TV라는 플랫폼을 통해 전달되는 드라마라는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그걸 "테레비 본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플랫폼이 대두되고 종이 잡지나 종이 책이 존재감을 상실하면서 에디터도 직업적 위기를 겪게 됐다. 잡지 에디터나 책 편집자라는 직업의 숫자와 직무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에디터한텐 위기였지만 에디터십으로선 기회였다. 전통적인 종이 플랫폼은 줄었지만 혁신적인 디지털 플랫폼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콘텐츠 가운데 무엇을 플랫폼이라는 그릇에 담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의사 결정의 수요는 오히려 증가했단 뜻이다. 전통적인 잡지사 에디터의 수요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에디터를 필요로 하는 분야는 실제로 늘어났다. 콘텐츠가 필요한 곳엔 언제나 에디터십도 필요하다. 협의의 에디터 시대가 끝나자 광의의 에디터 시대가 시작됐다.
에디터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는 이유는 에디터십을 요구하는 플랫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릇의 종류와 크기가 다양해지면서 그릇에 담길 물의 맛과 향도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엔 콘텐츠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여겨졌던 것들까지 플랫폼에 담기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됐다. 사실상 무한 플랫폼과 무한 콘텐츠의 시대다. 에디터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질 수밖에 없다. 선택은 에디터의 권능이면서 동시에 시험대다. 선택의 기준은 주객관적이다. 개인의 취향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취향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에디터는 세련되고 독특한 개인의 취향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이고 상업적인 대중의 취향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에디터는 콘텐츠를 선택해서 플랫폼에 담는 과정에서 우연과 선택과 현실과 의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무한 콘텐츠 가운데 씨앗을 우연히 발견한다. 씨앗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에디터의 호기심이 사람과 생각을 섞는다. 그걸 선택하는 건 에디터의 주객관적 판단이다. 작은 사례지만 수많은 패션 아이템 가운데 대중이 사랑할만한 요소를 찾아내서 잡지 화보와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올리는 건 전적으로 에디터의 감각에 달린 문제다. 그렇게 선택한 씨앗이 풍성한 콘텐츠로 자라나기 위해선 현실적 문제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것까지도 에디터의 몫이다. 에디터한테 이상을 현실로 바꿀 줄 아는 비즈니스 감각까지 필요한 이유다. 사람과 자본을 묶어서 콘텐츠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의지다. 무엇이든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시대엔 역설적으로 무엇이 반드시 콘텐츠가 돼야만 한다는 당위가 없다. 이것도 사실 수많은 선택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결국 이것을 완성해내겠다는 에디터의 의지만이 특정 기획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꼭 커버가 라이언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라이언을 커버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뿐이다.
에디터는 선택의 예술가다. 플랫폼과 콘텐츠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과정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암묵지다. 예술이란 인간적 감성과 기술적 이성과 집단적 우연이 결합된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다. 스티브 잡스가 자신을 비즈니스맨이라기보단 아티스트라고 정의했던 건 그래서였다. 오늘날 에디터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다만 과거엔 잡지나 책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에디터의 예술적 활동이 이젠 포털 사이트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광의의 에디터에 따르면 영화감독도 공연 프로듀서도 전시 큐레이터도 에디터다. 플랫폼과 콘텐츠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에디터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우리가 갖고 있는 에디터라는 직업 개념은 약간 다르다. 에디터는 영화나 공연이나 전시처럼 대규모의 콘텐츠보단 좀 더 미세하고 개인화된 콘텐츠의 영역에 더 잘 어울린다. 개인화된 플랫폼들의 성장과 함께 에디터의 개념도 확장된 탓이 크다. 우리는 트위터에선 개인의 주장이 페이스북에선 개인의 생각이 인스타그램에선 개인의 일상이 유튜브에선 개인의 상상이 자유롭게 공유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모든 플랫폼과 콘텐츠를 관통하는 기준을 하나 꼽자면 그건 개인의 취향이다. 개취 말이다.
지금은 취향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다. 취향은 미묘한 분야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대중적일 수 있다. 에디터는 취향을 편집하는 존재로서 다른 예술 영역의 편집자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에디터는 선택의 예술가이면서 취향의 예술가다. 개취의 시대에 에디터의 선택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