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카카오 브런치팀 매니저)
확고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동경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처음부터 ‘내 것'은 없다. 일단은 경험의 바다에 스스로를 내던져야 했다. 경험을 축적하고 걸러내고 분류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내 취향'이란 게 정립되었다. ‘인디 음악 좋아요'가 아니라 ‘1990년대 R&B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지만 끈적이지 않고 담백한, 창법이나 악기 구성이 뻔하지 않아 신선한 데다 아직은 덜 알려진 노래가 좋다'는 식으로 구체적 표현이 가능해졌다. ‘술 좋아요'가 아니라 ‘버번이 좋다'는 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아는 게 많아져서가 아니다.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수록 표현과 추천이 쉬워진다.
음악, 미술, 문학, 영화, 음식, 술, 음료, 패션, 정치, 경제, 인간관계 등등 삶의 모든 부분이 취향과 직결된다. 취향은 삶의 질마저도 결정한다. 내 경우에는 직업으로까지 이어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논 것이나 다름없는 이력으로 메이저 매거진 피처 에디터가 되었다. 뽑힌 이유는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글솜씨, 잡학다식함, 잘 놀 줄 아는 성향 등이었다. 취향이 흐릿하면 ‘잘‘ 노는 게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나중에 편집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에디터는 ‘확고한 취향’이란 기준으로 일상의 모든 것을 일과 연결시키는 직업이다. 취향이 확고하지 않은 에디터는 그 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북 에디터, 매거진 에디터는 물론 모든 분야의 ‘에디터'에 해당된다. 눈에 보이는 전문 기술이나 코딩 실력이 아닌 ‘취향’이 곧 자산이다. ‘문송’하다. 에디팅은 정보나 콘텐츠를 모으고 분류한 후 재조합하는 기술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아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쪽에 가깝다. 확고한 취향이란 게 없으면 혼돈이 혼돈인지조차 인지할 수 없다. 취향이 확고하면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기준이 명확하면 질서를 재정립하기 수월해진다.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과 에디터의 일은 상당히 닮았다.
《잡스 - 에디터: 브런치북 에디션》 편집을 맡게 되었을 때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하게 될 일이 북 에디터에 가까워서다. 보통의 경우 북 에디터는 자신이 편집한 책에 존재를 일부러 드러내지는 않는다. 단행본으로 인쇄하지 않을 뿐이지 ‘브런치북’이란 형태로 책 한 권을 만들어 내는 것이 미션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방향을 잡고 기획하고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를 의뢰했다.
원고를 받은 후에는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해 순서를 배치하고 구성을 잡았다. 교정, 교열은 물론 필요한 경우 리라이팅 작업까지 했다. 제목을 뽑고 소제목을 붙이고 각 글에 들어갈 이미지 작업도 의뢰했다. 에디터란 직업의 특성을 콜라주 방식으로 시각화하길 원했고 의도한 바가 잘 반영되어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결과물을 뽑아내 준 변연경, 김슬기 디자이너에게 심심한 감사 인사를 드린다.
여덟 개의 원고는 참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에디터란 직업을 정의하고 조명하고 있었다. 저널리스트 신기주는 ‘에디터는 스스로 직무 범위를 확대하면서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는 직업 가운데 하나’라며 ‘선택의 예술가'라 표현했다. 소설가 장강명은 에디터십을 파트너십에 빗대기도 했다. 스페이스오디티의 마케터 정혜윤은 에디터의 일과 마케터의 일이 유사한 지점을 잘 짚어냈다. 매거진 《B》 손현 에디터는 『잡스 - 에디터』 단행본 편집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에디터의 일과 의미를 디테일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줬다.
정문정 작가는 에디터로써의 노하우가 베스트셀러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를 만드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담당자인 장수연은 에디터의 감이 공간 구성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임채민 전 ‘세바시' 에디터는 초보 에디터 시절의 적응기를 잘 표현해주었다. ‘마시즘’ 김신철 에디터는 ‘덕후'의 ‘덕력'도 충분히 훌륭한 콘텐츠로 풀어낼 수 있음을 확실히 어필했다.
“어쩌면 내 커리어가 이들이 말하려는 바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고를 모두 읽고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 ‘나'를 굳이 드러내는 글로 닫는 글을 대신하게 되었다.
매거진 에디터로 시작해 디지털 콘텐츠 에디터를 거쳐 카카오 기획 직군에서 일하고 있다. 각각 일하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 줄기는 일맥상통한다. 특정 결과물을 위해 무질서에 몸을 던지고 흡수한 뒤 재조합. 고상한 단어로 기획, 취재, 편집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매거진 에디터일 때는 지면에 인쇄된 글과 이미지가, 디지털 콘텐츠 에디터일 때는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펼쳐지는 글과 이미지와 영상이 그 결과물이었다. 현재는 이런 식의 ‘브런치북'이 될 수도 있고 기타 여러 형태의 콘텐츠와 이벤트가 결과물이다.
“에디터의 일하는 방식은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앞으로 다양한 직종에서 에디터십이란 역량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매거진 에디터가 되기 위해 에디터 스쿨을 다니던 시절 수업 시간에 강사에게 들은 말이다. 10여 년 전이었으니 현시점에서 돌아보면 정확히 그 예측이 맞았다. 취향 없이 소비자나 유저나 독자의 취향을 건드릴 수 없다. 에디터십이란 역량이 들어가지 않은 결과물은 그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한다.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골라내는 사람
『잡스 - 에디터』 단행본의 부제다. 이 한 문장이면 설명이 충분하다. 에디터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는 에디터란 직업과 에디터십이란 역량, 에디터십의 확장성에 주목하고 있다. 당신은 ‘에디터십’을 갖춘 사람인가? 확고한 취향으로 다른 이의 취향을 움직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