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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Sep 28. 2022

잊혀진 계절이 되어버린 나의 오빠

나에겐,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돌봐준(또는 돌봐줬다고 주장하는) 열 살 차이 사촌 오빠가 있다.

오빠 말론 내가 갓난아기 때부터 본인이 동네에 업고 다녔으며, 똥기저귀도 치워줬고, 이유식도 먹였으며, 놀이공원에도 목마를 태워 데려 다녔다고 한다. 다 뻥으로 치부하기엔 드문드문 남은 사진들-놀이공원에서 5살쯤 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있어 한 57% 정도, 오빠의 말을 믿는다.


오빠는 서울 사람이고 나는 시골 아이라 방학 때 드문드문 만난 게 다였는데도 오빠는 어른들이 돌봐주지 않는 부분에 있는, 어린아이임에도 때로 어둡고 서글퍼지곤 하는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고 돌봐주었다. 특히 부모의 불화로 인한 마음의 그늘을 어두워지지 않게 유머로 밝혀주었다고 해야 하나? 암튼 웃긴 구석이 있었다.

'너, 아빠가 술 먹고 난리 치는 것 때문에 힘들지? 아~우리 아빠도 마찬가지야~아주 자식들이 피곤해 죽겠어(어른스러운 말투로 눈 찡긋). 그러니까 우리 피자나 시켜먹을까? 우리 아빠는 내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잘 들으니까 사달라고 조르면 바로 사줄 거야. 캬캬캬캭.'

본인도 학생 정도밖에 안 됐으면서 이런 식으로 날 웃기고, 결국 피자를 같이 시켜먹곤 했다.


오빠 책상에 있는, 어린이가 보기엔 신기하고 독특한 필기구들도 달라고 하면 생색을 내면서도 다 줬다. 포커를 가르쳐 준 것도, 지하철 표를 끊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서울의 밤거리를 같이 다녀 준 것도 다 오빠였다. 20살 때 호주로 워킹 비자를 받아 떠날 때도 오빠가 공항까지 데려다 줬다. 갓 들어간 회사에서 매일같이 야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새벽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까지 태워주고, 캐리어를 들어주고, 입국 심사를 지켜봐 줬다.


 오빠는 항상 여유가 있고 웃긴 사람이었다. 결혼해서 애를 셋 낳았는데 자식들 돌잔치 사회를 본인이 다 봤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선물도 나눠주고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아니 오히려 그걸 즐기는 사람, 그러면서도 시야가 넓어서 낯설어하는 사람을 기막히게 알아채 그 사람 옆에 앉아 말 걸어주는 사람이었다. 오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오빠를 좋아했다. 인기 많은 오빠의 마음에 내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자랑스러웠다.

내가 임용고사 떨어지고 서울로 면접 보러 다닐 때도 오빠는 일부러 시간을 내 밥을 사주고, 자기 집 방 한 칸을 치워 쉴 자릴 주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다. 애 셋을 키우면서도,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면서도, 승진 시험에 몇 번을 미끄러져 마음 가누기 어려웠을 텐데도 나란 존재를 기억해주고 마음을 살펴주었다. 아빠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일하는 오빠한테 뜬금없이 전화를 걸었을 때도 오빠는 기꺼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가 첫째를 낳았을 때도, 둘째를 낳았을 때도 오빠는 기저귀를 한 아름 사서 택배로 부쳐주었다. 나는 오빠가 애 셋을 낳는 내내 백수였어서 아무것도 못해줬는데도.


오빠는 이제 쉰에 가까운 나이가 다. 내가 마흔에 가까우니 오빠도 나이 드는 게 당연한데 오빠의 나이 든 모습에 때로 놀라곤 한다. 오빠는 이제 진짜 서울 사람 같다. 주말마다 골프를 치고, 철철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회사 중견 관리자가 되어서 매일 술을 마신다. 신앙심이 투철해서 누가 주는 술도 받아마시지 않았던 오빠였는데. 오빠의 따뜻하지만 단단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애 안 봐, 애는 너네 언니가 다 보지(언니랑 오빠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도), 난 집에선 조선시대처럼 해, 하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오빠.


아. 오빠도 옛날 사람이 다 되었구나. 나를 대했던 그 따사로움과 가정을 대하는 태도는 별개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한다. 나를 대하는 오빠의 모습과 가장인 오빠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냥, 삶이란 게, 사람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할 뿐.


얼마 전 우연히 만나게 된 자리에서 오빠가 '나 정도면 젊지. 회사 사람들도 다 내가 생각도 젊고 말도 잘 통한다고 해'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할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빠가 꼰대의 전형적인 대사를 읊고 있다니. 다정하고 다른 사람 마음을 잘 살폈던  오빠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오빠가 높은 직급이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은 쓴소리를 못하는 걸 텐데 그것도 모르는구나, 이젠.



그런 생각들을 했다.

 

어제는 문득 오빠가 많이 보고 싶어져 전화를 걸었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오빠는 아직 일터에 있었다. '네가 사는 곳과 여기의 삶은 달라, 수현아'하고 오빤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의 목소리가 너무 힘들고 피곤해 보여서 그냥 '많이 힘들지, 시골 한 번 와서 쉬고 가면 좋을 텐데'고 말했다.

오빠는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어. 네가 사는 곳은 너무 멀어'하고 대답했다.

일하는 사람 붙들고 이러저러 더 말할 수 없어서 그냥 보고 싶어서 연락한 거야, 힘내,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마음이 휑했다.

입술에 여러 말이 담겼다 흩어졌다.

오빠. 오빠의 삶이 힘들고 버겁겠지만 내 삶이 그에 비해 가볍다고 폄하해버리는 건 좀 슬프잖아, 라든지

이제 오빠의 삶에 내가 담겼던 구석은 사라졌구나, 라든지

 말 뭉치들이 모아졌다 흩어졌다 하며 가슴에 바람을 일으켰다.



이제는 내가 오빠보다 힘이 있고 삶에 여유가 있을 땐가 보다. 오빠가 나를 어떤 모습이든 아껴주고 돌봐줬듯 나도 오빠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이 글을 쓰면서 했다. 그래서 커피 쿠폰이랑 짧은 카톡을 남겼다. 오빠, 오빠한텐 내가 있잖아. 힘내, 뭐 그런 말들을 써서. 오빠가 내 카톡으로 조금이라도 힘이 나길 바라서 그렇게 했다.


우리 관계는 <잊혀진 계절>같이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도 나는 나의 유일한 오빠를, 어둡고 축축했던 어린 시절을 보살펴주고 볕에 내어 말려줬던 오빠를 사랑하고 있다. 혼잡한 가족사를 겪으면서도 유일하게 우울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세워갔던 오빠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도 누군가에게 오빠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서, 자꾸만 오빠의 빛났던 부분을 떠올려본다. 나중에 꼰대가 되든 어쨌든 다른 사람을 이유 없이 돌봐주고 자신의 시간을 내어줬던 부분은 내 삶에 그대로 남아있을 테니까. 오빠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타인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빠에게 배운 귀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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