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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씨 Dec 08. 2022

난 니 시종이 아니에요

우울은 정말 수용성일까

며칠 전, 폰 보면서 걷다 발을 헛디뎌 발목을 오지게 삐고 나서 계속 우울海를 헤매고 있다. 몸과 마음은 어찌 이리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몸이 아프니 마음이 자꾸 가라앉는다. 계속 잠만 자고 싶다. 주변 사람의 작은 무심함에도 쉬이 마음이 다친다. 조그만 짜증이 분노로 단번에 게이지를 올린다.


절뚝이며 걸으니 고질병인 허리 통증이 더 심해져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한쪽 발에만 체중이 실려서 몸이 굳는지 요가 가서 진땀만 바가지로 흘리다 왔다. 다리가, 팔이 안 펴진다. 진짜 구질구질하다. 아픈 몸으로 사는 거! 쌍욕이라도 시원하게 내뱉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뭔가 배터리가 잘 충전되지 않은 몸 상태로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안 그래도 마음이 마른 장작 같아 성냥 하나만 던지면 바로 화르르륵 타버릴 것 같은데, 우리 첫째는 그럴 때 꼭 기름을 붓는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저혈압인 나는 아침이 괴롭다. 오늘도 온몸이 물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우주에서 의지를 끌어모아 겨우 일어났는데 거실이 난장판이었다. 첫째가 읽던 책, 첫째가 가위로 오려 놓은 스케치북 조각, 첫째가 양치하다 흘린 양칫물, 첫째가 벗어놓은 김칫국물 묻은 잠옷 등이 온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침부터 잔소리하기 싫은데 진짜 그 꼬라지를 보니 짜증이 확 치솟았다. 숨을 들썩이며 진정하자, 진정하자 하고 있는데 첫째가 던지는 한마디.

"뭐해? 내 옷 꺼내놓지 않고.  마스크는 새 걸로 갈아 놨어? 머리는 동그랗게 말아서 묶어줘, 빨리. 나 이러다 학교 늦겠어. 엄마는 꼭 아침에 꾸물대더라."

아.

그대가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었나이다.

마음에 일던 작은 스파크가 첫째의 한마디와 만나니 대번에 불이 붙어 내 입에서 화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 네 책이나 치우고 엄마한테 뭐라고 해. 내가 네 시종이냐? 엄마가 아침마다 옷 챙겨놓고 가방 싸놓고 밥 먹은 거 치우는 거,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거 아니야? 자기 먹은 숟가락 하나 안 치우고 만화책만 읽으면서 엄마한테 그게 할 소리냐?"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첫째는 눈치 슬슬 보면서 요상한 조합으로 옷을 코디해 주섬주섬 입더니 대충 가방 메고 학교에 갔다.

하.

남겨진 자에게 죄책감은 필수 옵션.


화내고 학교 보낸 게 맘에 걸려 오늘 저 좋아하는 거(=도서관에서 만화책 실컷 보게 두는 거)해주려고 하교 시간에 맞춰 차를 끌고 나섰다.

"아침에 화 내서 미안해."

내 사과에 첫째는 뭔 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날 봤다가(첫째 입장에서 아침 시간은 너무 까마득한 옛날인 것이다) 이내 씩 웃으며 꼬투리 잡았다는 듯 거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첫째 : 알면 됐어. 그래서 내가 엄마를 안 좋아하는 거야. 아빠는 사랑하지만. 엄마는 좋은 점은 먼지만큼 밖에 없고, 나쁜 점이 수두룩하니까 늘 반성하도록 해.

나 : 정말? 엄마는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훨씬 많아? 좋은 점이 그렇게 없어?

첫째: (고개 끄덕끄덕)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옛말에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잖아."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진짜 진짜 마음이 상해버렸다.

내가 지한테 잘한 게 얼마나 많은데. 1시에 하교하는 거 맨날 데리러 가, 지 좋아하는 책 도서관에서 이고 지고 와서 빌려줘, 지 좋아하는 음식 저녁마다 차려, 몸에 좋은 간식 대령해... 나는 내가 잘한 것만 생각났다.

너무너무 속상하고 화나서 도서관 만화 코너에 저를 내려다 주고 뒤돌아앉아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쳇.

우울하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던데 집에 가서 뜨뜻한 물로 빡빡 씻으면 몸도 마음도 아픈 게 좀 덜하려나.

12월, 겨울, 늙음, 아픔, 무심한 자식시끼, 이런 게 다 한꺼번에 나를 우울로 처밀어 빠뜨린다.


집에 가서 보일러 쎄게 올리고 잠이나 자고 싶다. 다 진짜 너무해.



아무 말 없이 있은지 1시간째. 첫째는 내가 맘 상한 줄도 모른다.

만화책 실컷 보다 나한테 와서 한다는 소리 : 엄마. 이제 집에 가자. 집에 가서 빙고하고 싶어. 보드 게임도 한 판 하.



오늘 첫째의 학교 알림장 내용: 핸드폰을 보면서 걷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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