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Apr 12. 2023

어쩔 수 없이 헤픈 사람

어쩔 수 없는 강아지 인간


고등학교 때부터 마흔에 가까운 지금까지 내 삶을 지나쳐간 친구들이 나에게 내린 평가는 이랬다.


너는 누구랑 진짜 친한 지 모르겠어.
네가 너무 여러 사람한테 친절해서 처음엔 그게 진심같이 느껴지지 않았어.
넌 나 말고도 친구 많잖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내 어떤 부분이 친구들에게 이런 느낌을 주는 걸까. 내가 잘못 말한 부분이 있었나? 난 만날 때마다 진심이었는데. 나도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수없이 절교-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의 끊어짐-를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건 이런 거였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가 옅다. 혹은 경계가 옅은 사람이라고 타인에게 느끼게끔 하는 사람이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결단이 서면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당신의 어떤 부분이 좋다고, 좋아한다고 많이 말한다. 그 사람이 한 말들을 기억해 뒀다가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관계에서 시간과 물질 들이기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편지도 많이 쓰고, 선물도 많이 한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도 주기적으로 연락한다. 아는 사람들의 생일을 일정에 등록해 뒀다가 미리 선물을 챙긴다.


매 순간 진심이다.

다만 상대에게 잘하고 싶은 이 마음이 나의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게 문제다.

남들은 모른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고 싶어 하는지.


관계에 노력을 많이 들이니 연락하는 친구가 나름대로 꽤 있다. 그 친구들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쓴다. 타인의 일상을 챙기고 먼저 연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애가 많이 쓰이는 일이다. 하지만 기꺼이 한다. 내 자존감은 타인의 평가 위에 세워진 얄팍하고 나약한 것이기 때문에.


높은 불안으로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서, 상담 선생님은 상담 시작 전 받은 전문가 심리 검사결과를 분석해 주셨다. 내 사회적 민감성 검사 점수는 100점이었다. 다른 사람의 표정 변화나 말의 뉘앙스에 무지무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거다. 말의 내용 자체보다 태도나 눈빛 같은 비언어적 표현에 예민해 타인의 감정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점수가 증명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민감성 점수가 높으면 눈치를 잘 살펴서 사람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좋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민감도가 너무 높으니 항상 타인을 신경 쓰니 관계에서 필요 이상으로 피로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강하다. 나 편한 대로 사는 것보다 타인을 만족시켜 줬을 때 더 만족을 느끼고, 그래서 타인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좌절한다.


그런데 20회가 넘는 상담을 받으면서 이번에 마음을 이렇게 정리했다.


관계에 있어서 높은 불안, 자기 신뢰의 부족함, 그런 부분은 이미 지금까지 너무 오래 쌓아온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 당장은 그냥 둔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서 좋은 부분을 새롭게 발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나의 헤픔이 좋다.


엄밀히 말하면 나의 헤픈 부분이 좋을 때가 있다.

완벽주의자/불안/강박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스스로의 어떤 면을 좋아하는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기에 '때로-나의 어떤-부분이-좋을 때가-있다' 정도가 좀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타인이 나로 하여금 자신이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는 것, 연대감을 주는 것이 좋다. 나는 관계에 진심이므로. 진심으로 그런 느낌을 타인에게 주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어왔고, 나는 그들을 마음껏 신경 쓴다. 그 과정에서 때로 괴롭고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기껍다. 내가 타인을 먼저 받아들임으로써 타인도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서로의 경계가 겹치게 되는 순간이 반갑고 삶이 충만해지는 감각을 갖게 된다.


얼마 전 읽은 최현희 선생님의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에세이에서 '강아지 인간'이라는 단어를 봤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강아지 인간인 것이다.

힘들고 피곤해도 사람을 보면 꼬리가 흔들리고 마음에 들고 싶어 고개를 빼게 된다.

강아지가 아무한테나 꼬리 흔든다고, 헤프다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르지만 때로 나는 나의 강아지 같음, 헤픔-이 마음에 든다. 부러 꾸며서 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반가워서, 좋아서 흔들리는 꼬리이기 때문이다.


두서없이 쓰다 보니 맥락이 왔다 갔다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다.


나는 나의 (어쩔 수 없는) 헤픔을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당신도 받아들인다.

당신은 그 마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진심으로 나는 당신과 연결되고 싶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잘 살아야 남도 편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