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말하자면 모멸감과 부끄러움, 수치심을 주로 맛보며 사는 사람이며 삶이 자주 우울하다. 그런데 어쩌다 아주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난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만 그 눈부심에 질려버리고 만다. 슬금슬금 음지로 기어들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 내 나와바리가 아닌 곳으로 나와버린 것 같은 생경한 이질감.
어른이 되어 여러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나와 아주 다른 결의 사람을 만나게 될 일이 왕왕 있는데-'아내가 매일 아침밥 예쁘게 차려줘야 남자가 기가 살죠' 같은 말을 해맑게 웃으며 하는-그러면 나는 양지에 내놓은 버섯처럼 순식간에 쭈글쭈글해진다.
책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레 다양한 삶에 대한 공감이 따라올 거라 생각했는데, 책 읽는 모임에서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으면 '응?? 왜 자존감이 저렇게 낮지??왜 매사에 쓸데없이 심각하지?'같은 표정을 마주할 때가 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나눌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 ... 물론 그럴 수 있다.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앞에 앉아 대화하고 있는데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너무 높고 커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땐 막막해진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진다. 지독하게 외로워진다.
오늘 글쓰기모임에서 '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조자도, 타인에게 다양한 삶의 결이 있다는 걸 이해받지 못할까? 책엔 별의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현실에 사는 암울한 한 인간의 이야기는 황당하게만 받아들이는 걸까?'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우문에 놀랍도록 현명한 대답을 미야 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이 가슴을 쳤다.
"글 쓰는 사람은 자존감이 진동할 수밖에 없어요. 책 읽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음습한 부분, 들춰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수치스러웠던 기억, 너무나 사적인 더러움들을 자꾸 열어 보고 글로 쓰기까지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행복도가 올라가거나 자존감이 채워지긴 어렵다. 오히려 자존감을 깎아먹음으로써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내 경우는 사적인 더러움의 공적 배설이 글쓰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삶이 충만하고 빈 곳이 없는 것 같을 땐 글이 써지지 않는다. 드럽게 외롭고 치사해서 치가떨릴 때, 삶이 텅 빈 것 같고 진흙창에 빠져 있는 것 같을 때 비로소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된다.
그렇다.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마음의 영역을 쓰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인 것이다. 내 안에서도 책 읽는 자아와 글 쓰는 자아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일상의 자아가 죽었을 때-밥을 차리고 치우고 아기를 씻기고 그릇을 씻고 바닥을 닦는- 비로소 노트북 앞에 앉을 수 있다. 책 읽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글 쓰는 것과는 동떨어져있다.
아마 나는 끝까지 밝고 명랑한 글을 쓰진 못할 것이다.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글은 쓸 수 있을지 몰라도. 글을 쓸 땐 내 안에 있는 깊은 우물 같은 것이 아가리를 벌리고 내 일상의 행복 같은 것들을 빨아들인다. 그래서 행복한 이야기 같은 것은 쓸 수가 없다.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은 것처럼 어둡고 습한 어딘가로 스윽 빨려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깊고 깊은 산에도 어딘가 해가 잠깐 드는 곳이 있듯 그런 빛은 반짝하고 존재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글이란 건, 글쓰기라는 건 애초에 행복한 존재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