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씨 Aug 21. 2023

민폐 끼치지 않는 할머니

김범, <할매가 돌아왔다>

나의 할머니 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인생도, 사랑도 평탄했다.  그다지 애달픈 일도 어려운 일도 방해물도 갈등도 없이 적당한 때에 만나 ... 그저 그런 이야기.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같다. 그 당시엔 나만 겪는 일 같고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슬픈 것 같았다. 지금 겪는 일을 못 넘어설 것 같고 영원히 못 잊을 것 같고 그랬다. 하지만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특별한 깨달음 없이, 대단한 역전 없이 흘러 흘러 그냥 살게 된다. 당장 죽을 것 같았던 괴로움도, 더는 못 살 것 같았던 비통도 시간을 따라 흐른다. 삶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큰 업적이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매일 시간을 깎듯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살아진다. 아무것도 없이도 살아진다.


할머니가 '그게 그땐 최선인 줄 알았다.  ... 피할 수 없는 길을 피하면 그 대가를  아주 오래도록 치러야 한다'고 말했을 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순간의 최선을 다해 산다고. 그때 견뎠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알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인간은 쉽고 편한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폭력을 쉽게 용인하지 않는 길이라든가. 갈등이 생기더라도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쳐야만 하는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재산인 60억이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생각해 봤는데-제약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

돈 앞에서 쩨쩨해지지 않고, 누가 밥을 살까 눈치 보지 않고, 친구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돈 따지지 않고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달에 적은 돈을 벌어도 마음 초조해지지 않고 싶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돈이 무한정 내 행복 곡선을 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통장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백만 원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도 돕고 나도 도우면서 좀,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으면. 여윳돈이 있어서 삶이 좀 편해졌으면. 백만 원은 누군가에겐 적은 돈일 수 있지만 나에겐 정말 큰돈, 여유로 가지기엔 너무 큰돈이니까.


그리고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생각했다.

제일 처음 떠오른 생각은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거.

그런데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 몸이 늙고 낡아 어쩔 없이 삶이 다소 지저분해지더라도 편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수용할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와 불화하지 않고, 내 존재에만 너무 천착하지 않고, 좀 넓고 부드럽고 날 서지 않 사람이었으면.

세월은 날카로웠던 부분을 오히려 더 가파르게 만들곤 하기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덥고 힘들고 사는 게 너무 무겁고.. 요즘 그랬다. 사실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왔다. 작가의 가부장적인 시선들이 자꾸 눈에 밟혀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이었다. 하지만 독서토론 필독서로 이 책이 선정되고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책을 통과한 보통 사람들의 최선의 삶이 보인다. 각자의 삶을 애써 사는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밥을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조금 힘이 난다. 이렇게 또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산다. 삶은 원래 그런 거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고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휘발되듯이, 남는 것 없이 살다 가고 싶다. 너무 큰 바람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분의 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