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갔으면 간 것이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천 번을 머뭇댔어도

by 수현씨

아침부터 우울감에 빠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오. 이런 기분 오랜만인데.

운동을 스킵하고 어린이가 하교할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고 싶은 마음, 오전 내내 넷플릭스를 보거나 웹툰을 정주행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오랜만의 일이다. 부지런한 인간이 아닌데도 요즘은 참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아침에 애들 등교시키면서 바로 요가원에 갔다가, 장을 보고, 혼자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빠르게 해치운 뒤 남은 시간엔 글을 썼다. 애들 하교하고 나면 정신이 없으니 어떤 의미에선 잡생각이 끼어들 여유가 없었다. 밤엔 애들 재우면서 같이 잤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운동을 빼먹고 그냥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한껏 우울을 즐기고 싶다. 좀 혼자 있고 싶다! 아침에 운동을 가게 되면 어쩔 도리 없이 성실하게 살 수밖에 없는데, 오늘 장도 봐야 하고 서랍 정리도 해야 되는데, 누워만 있으면 그 모든 일을 안 해도 될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가면 뭐라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안 나가면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진흙탕에 그냥 굴러도 된다. 거울을 보니 어젯밤에 감고 잔 머리가 중력의 반대방향으로 솟아 있다. 와. 이런 머리 쉽지 않은데 대체 어젯밤에 베개와 어떤 콜라보를 벌인 거니. 세상에 나가려면 머리 빡빡 감고 말리고 모양 잡는 과정을 거쳐야겠구나. 머리 감을 생각하니 만사가 귀찮다. 화장실에 누워 있으면 누가 빨래 빨듯 내 머리 감겨줬으면, 이런 헛생각을 하면서 건성으로 둘째 입에 밥을 떠먹였다. 다섯 살이나 된 녀석이 아직도 안 떠먹이면 밥을 안 먹네. 가정교육이 엉망이구만, 이런 생각도 하면서.


첫째 등교시키고 이제 정말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요가 수련은 9시 20분 시작인데. 현재 시간 8시 50분. 팔에 부스터 달아서 부아아아앙 머리 감고 대충 말리고 둘째 둘러업고 등원시키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할 수 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오늘 하루를 집 먼지와 함께 뒹구르르 하며 보낼 것인가, 아니면 엉덩이를 떼고 양말을 신을 것인가(김필영 작가님 세바시 강연 말씀 인용).


머리 쥐어뜯으며 갈등하느라 잠깐 애기한테서 눈을 뗐을 뿐인데.

둘째가 태권도 발차기로 순식간에 식탁 위에 한 통 가득 떠 놓은 물을 통째로 퍼퍽, 쏟았다. 거의 2리터의 물을 한꺼번에.

그야말로 홍수가 났다. 식탁 위에 있던 모든 음식 그릇과 약봉지와 지가 그린 티니핑 그림이 젖었고, 식탁에서 흘러내린 물은 면 쿠션으로 만들어진 의자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며 슬금슬금 경계를 넓혀가고 있었다.

지금은 쓰다 보니까 웃음이 나는데, 당시에는 미친 메뚜기처럼 날뛰며 화장실에서 수건 여러 장 갖고 와 점점 넓게 번지는 물을 닦으면서 입으로는 모터 단 것처럼 바바바박 애한테 썽질을 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아침부터 엄마가 이 난장판을 수습하느라 이래야겠냐 대체 무슨 생각이냐 너 태권도 다닐 자격이 없다 당장 때려치워라'같은 말들로 아주 랩을 했다.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발광을 하면서 온 사방에 번들거리는 물을 닦아냈다. 다 닦고 나니 흠뻑 젖은 수건이 7장 나왔다. 물이 뚝뚝 듣는 수건을 세탁기에 던져 넣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시발.

나가자.

집구석에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나 들으면서 자식한테 소리 지른 거 자책하고 있고 싶지 않다.


머리 감을 시간이 없어서 그냥 대충 물 묻혀 중력 방향으로 빗었다. 꽥꽥 소리 지르며 화내는 엄마 서슬에 소리도 안 내고 눈물 흘리고 있던 둘째를 둘러업었다. 업자마자 엉엉, 엄마, 잘못했어요 하면서 얼굴을 등에 부비며 운다. 어이구. 이런 놈한테 소리나 지르고. 에미가 진짜 자격이 없다.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면서 유치원까지 애를 업고 달렸다. 울먹이며 유치원 문 앞에서 손 흔드는 애기를 보면서 오만 생각이 들었다. 휴, 오늘도 엄마 구실 똑바로 못 했구나, 물은 닦으면 그만인 것을.


그리고 요가원에 갔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천 번도 넘게 망설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운동을 간 거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일단 갔으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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