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했던 나의 청년기 시절
제목 그대로입니다. 저는 마흔네 살의 초등학생 두 딸의 외벌이 아빠입니다. 그것도 얼마 전 회사를 때려치우고 소일거리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했는데 차비도 안나오는 정도니 5개월째 백수생활을 하는중입니다. 자발적으로 때려치웠다고 실업급여도 못 봤는답니다. 그런 사실 처음 알았습니다. 왜냐면 지난 16년의 직장 생활 동안 단, 하루도 실업자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간 너무 앞만보고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원래부터 행사 제작자였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열심히 꿈을 키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대학시절을 어영부영 살면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뭐 신나고 멋지고 폼나게 논 것도 아닙니다. 한창 유행했던 심시티(도시건설 게임)라는 엔딩이 없는 PC게임에 두 눈 씨벌 게 질정도로 하고, 당구도 못 치면서 친구들과 같이 안 다니면 무슨 큰일이 나는 건지 알고, 휩쓸려 다니면서 당구장에서 짜장면이나 먹으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피 같은 시간을 보내다 군대를 가게 되죠. 그것도 엄청 힘든 특공연대로. 거기서 살면서 처음해보는 별별 힘든 경험을 다해봅니다. 그때 다행히 느끼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막노동꾼 출신으로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화제를 모은 장승수 씨(지금은 변호사죠)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이야기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특공연대에서의 군생활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죠.
"역시 몸 쓰는 거보다 머리 쓰는 게 편하구나"하는 너무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다시 먹습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입학할 때부터 적성이고 뭐고 점수에 맞춰서 들어간 학과공부는 도저히 못하겠는 거죠. 그래서 군 제대 후 지금은 사라져 버린 후암동 해방촌의 산꼭대기에 있는 정일학원에 등록을 하게 됩니다. 매일매일 행군 삼아 그 언덕을 뛰어올라가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친 듯 수능을 준비하죠.
그렇게 남들보다 돌아서 인생을 시작을 하게 됩니다. 뒤늦게 들어가니 대학 동기들도 3~4살씩 어린 동생들이니 같이 놀게 없는거죠. 그 나이 때는 한 살 차이도 커 보이는 나이대니까요.
그래서 꿈을 정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스포츠마케터(에이전트)가 될 거야!!"하고요. 그때부터 어머니한테 돈 뜯어내서 유럽의 축구장 투어를 위한 배낭여행도 가고요.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기_사실 규칙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갑니다_를 본다고 말레이시아로 공부를 가장한 관광을 갑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 대학생활도 끝나갑니다. 나이도 꽤 먹죠. 28살인가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스포츠마케터가 되겠다고 목표를 정하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박세리, 박찬호 선수가 활약한 이후에는 에이전트와 스포츠마케팅 회사들이 생겼지만, 사실 그땐 그런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요즘같이 대학생이 창업을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할 실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SM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구인 사이트에 올라왔네요. 그때의 SM은 보아와 HOT 시절이었습니다. 스포츠 선수를 마케팅하는 거나 인기스타 가수를 마케팅하는 거나 메커니즘은 비슷하겠다 싶어 지원을 했는데 철커덕 되네요~ 지금 보니 제가 뛰어나서 채용된 것이 아니라 그때는 워낙 직원들이 들락날락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SM에 입사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다닐 당시에는 월급이 용돈 수준이었으니 더욱 입퇴사자가 많을 때 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제가 그곳에서 했던 여러 일 중 기억나는 실적은 동방신기가 해외 어디로 화보를 촬영하러 가는데 협찬을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연령대의 소비재 상품 리스트를 쭉~ 뽑아보고 무작정 그 회사 홍보팀에 전화하고 메일로 관련 내용 발송하고 해서, 매일유업인걸로 기억합니다만, 신제품 음료수 론칭하는데 동방신기 친구들이 홍보해 주는 대가로 협찬을 받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마케터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도 6개월 정도밖에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결혼을 하게 되죠. 그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겁니다. 당시 저희 아내는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서 중국어 강사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외벌이는 아니었지만 둘 다 수입이 변변치 않은 시기에 눈이 맞아 만난 지 6개월 만에 식을 올리게 됩니다. 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애기도 바로 못 갖죠. 그래서 여러 번의 두드림 끝에 이직을 하게 됩니다.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는 시기입니다. 그러면서 첫 아이도 생기게 되고요. 아기가 생기니 학원강사를 하는 아내도 육아에 집중하게 되죠. 그때부터 저의 외벌이 인생이 시작됩니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