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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박사 Sep 20. 2018

제1화_나는 행사 제작잔가?!

방황했던 나의 청년기 시절

제목 그대로입니다. 저는 마흔네 살의 초등학생 두 딸의 외벌이 아빠입니다. 그것도 얼마 전 회사를 때려치우고 소일거리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했는데 차비도 안나오는 정도니 5개월째 백수생활을 하는중입니다. 자발적으로 때려치웠다고 실업급여도 못 봤는답니다. 그런 사실 처음 알았습니다. 왜냐면 지난 16년의 직장 생활 동안 단, 하루도 실업자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간 너무 앞만보고 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쉬면서 생각해보니 '내가 원래부터 행사 제작자였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열심히 꿈을 키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대학시절을 어영부영 살면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뭐 신나고 멋지고 폼나게 논 것도 아닙니다. 한창 유행했던 심시티(도시건설 게임)라는 엔딩이 없는 PC게임에 두 눈 씨벌 게 질정도로 하고, 당구도 못 치면서 친구들과 같이 안 다니면 무슨 큰일이 나는 건지 알고, 휩쓸려 다니면서 당구장에서 짜장면이나 먹으며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보통 12시간은 해야하는 게임_심시티

그렇게 피 같은 시간을 보내다 군대를 가게 되죠. 그것도 엄청 힘든 특공연대로. 거기서 살면서 처음해보는 별별 힘든 경험을 다해봅니다. 그때 다행히 느끼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막노동꾼 출신으로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화제를 모은 장승수 씨(지금은 변호사죠)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이야기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특공연대에서의 군생활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죠.

당시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인터뷰로 전국 수십만 수험생의 공공의 적으로 등장한 장승수씨

"역시 몸 쓰는 거보다 머리 쓰는 게 편하구나"하는 너무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다시 먹습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입학할 때부터 적성이고 뭐고 점수에 맞춰서 들어간 학과공부는 도저히 못하겠는 거죠. 그래서 군 제대 후 지금은 사라져 버린 후암동 해방촌의 산꼭대기에 있는 정일학원에 등록을 하게 됩니다. 매일매일 행군 삼아 그 언덕을 뛰어올라가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친 듯 수능을 준비하죠.

이 곳을 매일 올라야  대학에 합격한다는 소문의 정일학원 108계단

그렇게 남들보다 돌아서 인생을 시작을 하게 됩니다. 뒤늦게 들어가니 대학 동기들도 3~4살씩 어린 동생들이니 같이 놀게 없는거죠. 그 나이 때는 한 살 차이도 커 보이는 나이대니까요.

스포츠에이전트를 다룬 영화 제리맥과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꿈을 정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스포츠마케터(에이전트)가 될 거야!!"하고요. 그때부터 어머니한테 돈 뜯어내서 유럽의 축구장 투어를 위한 배낭여행도 가고요.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기_사실 규칙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갑니다_를 본다고 말레이시아로 공부를 가장한 관광을 갑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 대학생활도 끝나갑니다. 나이도 꽤 먹죠. 28살인가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스포츠마케터가 되겠다고 목표를 정하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박세리, 박찬호 선수가 활약한 이후에는 에이전트와 스포츠마케팅 회사들이 생겼지만, 사실 그땐 그런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요즘같이 대학생이 창업을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할 실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SM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구인 사이트에 올라왔네요. 그때의 SM은 보아와 HOT 시절이었습니다. 스포츠 선수를  마케팅하는 거나 인기스타 가수를 마케팅하는 거나 메커니즘은 비슷하겠다 싶어 지원을 했는데 철커덕 되네요~ 지금 보니 제가 뛰어나서  채용된 것이 아니라 그때는 워낙 직원들이 들락날락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SM에 입사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동방신기 음료수 협찬으로 인생처음으로 돈을 벌어봅니다

제가 다닐 당시에는 월급이 용돈 수준이었으니 더욱 입퇴사자가 많을 때 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제가 그곳에서 했던 여러 일 중 기억나는 실적은 동방신기가 해외 어디로 화보를 촬영하러 가는데 협찬을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연령대의 소비재 상품 리스트를 쭉~ 뽑아보고 무작정 그 회사 홍보팀에 전화하고 메일로 관련 내용 발송하고 해서, 매일유업인걸로 기억합니다만, 신제품 음료수 론칭하는데 동방신기 친구들이 홍보해 주는 대가로 협찬을 받아온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마케터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2004년11월, 이때부터 나만 벌어야되는 시기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그 생활도 6개월 정도밖에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결혼을 하게 되죠. 그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겁니다. 당시 저희 아내는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서 중국어 강사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외벌이는 아니었지만 둘 다 수입이 변변치 않은  시기에 눈이 맞아 만난 지 6개월 만에 식을 올리게 됩니다. 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애기도 바로 못 갖죠. 그래서 여러 번의  두드림 끝에 이직을 하게 됩니다. 조금씩 안정이 되어가는 시기입니다. 그러면서 첫 아이도 생기게 되고요. 아기가 생기니 학원강사를  하는 아내도 육아에 집중하게 되죠. 그때부터 저의 외벌이 인생이 시작됩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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