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평가위원 소회
저도 처음엔 '포트폴리오'가 제일 중요한 줄 알았습니다. 평가위원으로 위촉되어 심사장에 앉을 때마다, 업체들이 들고 오는 두툼한 제안서와 화려한 과거 이력을 보며 "역시 해본 놈이 잘하겠지"라는 편견을 가졌던 게 사실입니다. 수억 원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경험, 대기업과의 파트너십 기록... 이런 것들이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최근 한 입찰 평가장에서 저는 그 믿음이 얼마나 구시대적인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캡처해 온 업체들 사이에서, AI 영상으로 '본 사업의 결과물'을 미리 그려온 업체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단순히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레퍼런스라는 이름의 '과거'가 AI가 구현한 '미래'에 처참히 무너지는 현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이미 업계의 공기는 바뀌었습니다. 송길영 박사가 말하는 '경량 문명(Lightweight Civilization)'이 비즈니스의 최전선인 입찰 현장에서 어떻게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지, 평가위원의 시선으로 본 그 생생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1. "설명하지 말고 보여라" : 레퍼런스의 유통기한이 끝난 이유
평가위원석에 앉아 있으면 수많은 업체의 '자기자랑'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10년 전부터 이런 일을 해왔고, 저런 상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평가위원의 머릿속에서 '상상'을 요구합니다. "아, 저런 걸 해봤으니 이번에도 잘하겠지?"라는 막연한 추측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본 한 업체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런 걸 잘한다"고 말하는 대신, AI를 활용해 이번 사업이 완공되었을 때의 모습, 홍보영상의 핵심 톤앤매너를 단 1분 만에 현시(Show, don't tell)했습니다.
과거의 레퍼런스는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라면, AI로 만든 시안 영상은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미리 입어본 느낌이었습니다. 평가위원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라는 리스크를 제거해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 기울 수밖에 없더군요. 이제 "옛날에 뭐 했어요"는 안 통합니다. "지금 뭘 보여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즉각 답하지 못하는 회사는 평가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잊혀집니다.
2. 종이 한 장의 차이 : AI가 만드는 '수주'와 '낙방'의 디테일
재미있는 점은 AI 영상을 가져온 업체들 사이에서도 '퀄리티의 격차'가 극명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AI 툴을 돌려본 수준과, 평가위원을 압도할 만큼 정교한 미장센을 뽑아온 업체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 한 장이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수주와 탈락을 가릅니다.
안목의 차이: 어떤 프롬프트를 던져 어떤 감도를 끌어냈는가?
밀도의 차이: 단순히 화려한가, 아니면 사업의 본질을 꿰뚫는 서사가 담겨 있는가?
편승의 의지: 이 기류를 단순히 '도구'로 보느냐, 아니면 '생존 전략'으로 보느냐의 차이.
평가위원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AI 영상이 제안 단계의 가상 결과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퀄리티를 통해 업체의 '미래 대응 능력'을 평가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 이 기류에 편승하지 못한 업체에 우리 사업을 맡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그 업체는 경쟁에서 탈락입니다. 퀄리티의 미세한 차이가 결국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척도가 된 것이죠.
3. 중량 문명의 종말 :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이긴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조직의 크기'와 '경험의 두께'를 숭상하는 중량 문명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송길영 박사는 단언합니다. 이제 거대한 조직도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속도'와 '개인의 밀도'가 중요한 경량 문명의 시대라고요.
이번 입찰장에서도 그 전조를 보았습니다. 수십 명의 인력을 자랑하며 과거 레퍼런스 책자를 들고 온 대형 업체보다, 단 몇 명의 핵심 인력이 AI를 활용해 퀄리티 높은 시안을 들고 온 소규모 업체가 훨씬 더 유연하고 강력해 보였습니다.
평가위원으로서 느낀 공포는 이것이었습니다. "아, 이제는 과거의 이름값이 지켜주지 않는구나." 이 변화의 기류를 타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과거를 가졌어도 아예 경쟁 자체가 안 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가볍게 움직이며 AI라는 날개를 달고 실시간으로 결과물을 증명해내는 자들만이 이 비정한 입찰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총평 : 과거의 훈장을 떼고 미래의 거울을 드십시오
평가위원의 입장에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레퍼런스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이 이미 '받은 점수'이지, 우리가 '줄 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봅니다. AI 영상을 통해 보여준 그 종이 한 장 차이의 퀄리티, 그리고 세상을 읽는 그 기민한 태도에 점수를 던집니다.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며 "우리가 누군지 알아?"라고 묻는 대신, "우리가 만들 미래는 이렇습니다"라고 당당히 보여주십시오.
기술은 평준화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도구를 다루는 당신의 안목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뿐입니다. 파도를 타지 못하면 물에 잠길 뿐이지만, 파도를 타면 누구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핵심 정보 요약]
평가 트렌드 변화: 평가위원들은 이제 과거의 레퍼런스보다 AI를 통해 구현된 현재의 시안 퀄리티에 더 큰 비중을 둠.
경량 문명의 도래: 조직의 규모가 아닌, 기술을 활용한 의사결정 속도와 구현 능력이 신뢰의 척도가 됨.
디테일의 승부: AI 영상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미세한 퀄리티 차이가 업체의 안목과 성의를 대변함.
생존 전략: 세상의 기류에 편승하여 '설명'의 비즈니스에서 '증명'의 비즈니스로 즉각 전환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