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나를 막아서던 짙은 안개를 걷어내며

by 오종민

저는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을 참 좋아합니다.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나는 초인적인 힘을 동경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한층 더 강해지며 영웅으로 성장해 가는 그 스토리 구조가 좋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늘 몇 번의 거대한 한계벽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깊은 명상이나 깨달음을 통해 그 벽을 산산조각 내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곤 하죠.


우리의 생각과 창의력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분명 제 안의 낡은 틀을 깨부수고 싶은데, 무언가 보일 듯하면서도 짙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책을 읽고 깊은 사색을 거쳐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막상 어떤 주제를 놓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늘 뻔하고 단편적인 대답만 맴돌 뿐입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남들이 말하는 '잘 사는 법'에 대한 몇 가지 모범 답안만 떠오릅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내놓은 해결책이라고 써놓고 보면, 결국 어디선가 읽어본 적 있는 내용이거나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이야기일 때가 많습니다. 분명 제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가 아닌데, 도무지 그 너머의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해집니다.


제 생각이 아주 견고한 틀 안에 갇혀버린 느낌입니다. 그 틀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마치 마음속에서 방어기제가 작동하거나 뇌가 더 이상 에너지를 쓰기 싫어하는 것처럼 딱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맙니다. 다른 훌륭한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와,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감탄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들의 색다른 시선을 알아채고 감동하는 걸 보면 제 안에도 분명 틀을 깰 수 있는 감각이 살아있는 것 같은데, 막상 제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려고만 하면 자꾸만 안전한 '정답'만을 찾으려 듭니다.


생각에는 애초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생각이 남들과 다르면 어쩌지?", "과연 이 방향이 맞는 걸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익숙한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의미심장한 문장을 만나면, 스스로 그 의미를 온전히 곱씹어보기 전에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해 해설집의 '정답'부터 찾아보곤 합니다. 이런 얄팍한 습관이 생각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장의 답답함을 참지 못해 자꾸만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셈이지요.


이제는 그 짙은 안개 너머에 숨겨진 제 진짜 생각들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견고한 틀을 시원하게 깨부수고, 펄떡이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마음껏 던져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진짜 내 글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문맥에 좀 맞지 않고 말이 안 되더라도,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거침없이 한 번 써보려 합니다. 오직 나만의 글이기에 세상 그 어디에도 정해진 해설지나 답안지가 없을 테니, 저도 모르게 또 정답을 찾으려 애쓰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한계를 부수고 나아갈 때, 비로소 제 가슴을 뛰게 하는 진짜 문장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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