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나와 다른 존재와 인연을 맺는다. 그 과정엔 행복함, 괴로움, 슬픔,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도 함께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어쩌면 다른 행성에서 살던 이들끼리 합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신 시대적 분위기와 먹는 것 마시는 것 등이 같을 뿐이다.
인간관계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어느 시점에서 만난 사람을 단기간에 파악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몇 년을 만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치부를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하기에 항상 가면을 쓰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보인 몇 가지 행동을 보며 그는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판단한다. 그러다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행동 또는 생각을 하는 그들과 충돌하는 지점이 발생한다.
우린 '누군가를 잘 안다'라고 단정 짓는 실수를 종종 한다. 그렇기에 그를 내 생각의 틀 안에 가두고 그가 조금 다른 행동을 하면 내 멋대로 판단한다. 그가 처한 상황, 마음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위주로 그가 오늘 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된다. 벌써 그 부분에서 어긋남이 발생하고 둘의 의견차이는 좁혀질 수 없게 된다. 시작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맞다고 믿으려는 자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는 자 사이에서는 접합점을 찾을 수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여 년의 세월을 각자 살아온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눈다고 했을 때 이들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랑해'라는 말속에는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을 담은 걸까? 서로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상대의 삶에 대한 이해가 아닌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이해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우린 여기서부터 인간관계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고 같은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삶의 접점을 찾아내야 한다. 접점이 없다면 그냥 그렇게 하도록 놔두면 된다. 굳이 그것을 가지고 맞니 틀리니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싸우고 나서 '왜 이런 걸 가지고 싸웠을까?' 후회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누군가를 다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관계가 원만하게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